불교총지종

총지소식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밀교수행은 보리심·자비심과 공성에 대한 깊은 성찰

페이지 정보

호수 297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8-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

페이지 정보

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8-06 14:53 조회 442회

본문

밀교수행은 보리심·자비심과 공성에 대한 깊은 성찰

제2절 현밀이교(顯密二敎)의 차이점(差異點)


1. 현밀이교(顯密二敎)의 비교(比較)

현밀이교(顯密二敎)가 근본적(根本的)으로 다른 것은 꼭 알아야 할 것이다. 이에 그 차이점(差異點)을 대략 밝혀둔다.

원래 불교에는 삼신(三身-법신法身, 보신報身, 응화신應化身)이 있고 교(敎)에는 현밀(顯密)이 있다. 응화불(應化佛)이 설(說)한 것을 현교(顯敎)라 함이니 말을 간략(簡略)하게 중생(衆生)들의 근기(根機)에 맞추었고, 법신불(法身佛)의 담화(談話) 이것을 밀장(密藏)이라 하는 것이니 말이 비오(秘奧)하여서 실상(實相)말이다.

현교의 계경부(契經部)는 팔만사천(八萬四千)으로 장(藏)으로 나누면 삼장(三藏), 승(乘)은 1,2,3,4,5의 분별(分別)이 있으며 수행(修行)은 육도(六度)를 종(宗)으로 하여 52위(位)가 있고 성불은 삼대겁(三大劫)을 한정(限定)으로 한다.

법신대일여래(法身大日如來)의 설(說)한 것을 밀교라 함이니 자성수용불(自性受用佛)은 자수법락(自受法樂)인 연고로 자권속(自眷屬)과 각각 삼밀문(三密門)을 설한 것이다. 이 삼밀문은 여래내증지(如來內證智)의 경계(境界)이므로 등각십지(等覺十地)도 능히 집에 들어오지 못하거던 어찌 하물며 이승범부(二乘凡夫)이겠느냐. 그러므로 현교(顯敎)에서 비록 성불(成佛)을 설(說)하나 중생(衆生)의 근기(根機)를 교화(敎化)하기 위하여 설(說)하기 때문에 진실(眞實)한 성불이 없는 연고로 교도불(敎導佛)이라 하며 밀교는 실(實)로 성불(成佛)하는 연고(緣故)로 증도존(證道尊)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현교는 근기상응(根機相應)하는 수타(隨他)의 법문(法門)이고 밀교는 불(佛)이 자내증(自內證)한 지혜(智慧)의 수자(隨自)의 법문(法門)이다.


현교(顯敎)에 대한 밀교(密敎)의 특색(特色)으로 다음의 네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역사적(歷史的) 인물(人物)인 석존(釋尊)의 설법을 현교라 하고 영원한 진리를 불격화(佛格化)한 법신대일여래(法身大日如來)의 설법을 밀교라 한다.

②. 각오(覺悟)한 내용에 대하여 말이나 문자로써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현교요. 상징(象徵)을 통(通)하여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밀교라 한다.

③. 현교는 장기간(長期間-삼겁三劫) 수행을 거쳐서 성불(成佛)이 가능하다고 하나, 밀교는 삼밀의 유가(瑜伽)에 의하여 현세(現世)에서 즉신성불(卽身成佛)한다고 설하고 있다.

④. 밀교는 많은 훌륭한 특색(特色)을 가지고 사람마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현세이익(現世利益)을 주고 현교는 염불왕생(念佛往生)이나 수행각오(修行覺悟)를 주(主)로 설(說)한다.

현교(顯敎)는 심본색말(心本色末)을 주장(主張)하니 미래중심(未來中心)의 유심적(唯心的)인 불교이므로 결국(結局)은 사후불교(死後佛敎)가 되며 밀교는 색심불이(色心不二)를 주장하니 현세중심(現世中心)의 현실적(現實的) 실천불교(實踐佛敎)가 된다.


심본색말(心本色末)이란 무슨 뜻인가 하면 현교에서 실상(實相) 모든 이치(理致)는 미묘(微妙)하다고 근본(根本)이라 하여 앞세우고 색상현실(色相現實) 모든 일은 허망(虛妄)하다고 끝이라 하여 뒤따르게 함을 말함이니 한 이치(理致)에서 모든 일이 벌어진다는 현교의 교리강령(敎理綱領)인 일원논리(一元論理)이다.

색심불이(色心不二)는 무슨 뜻인가 하면 밀교에서 색상현실(色相現實) 모든 일은 곧 진리(眞理)이며 실상(實相)으로 보아서 색(色)을 품안에 넣지 않고 이것이 이치(理致)라고 하는데 물(物)과 심(心)이 평등(平等)해 지는 고로 일체(一切) 세간현상(世間現狀) 그대로 불법(佛法)과 일치함을 체득(體得)하는 밀교의 교리강령(敎理綱領)인 이원론리(二元論理)이다. 또 현교와 밀교는 중생교도(衆生敎導)의 방법(方法)도 각각 다르다. 

밀교의 교주법신불(敎主法身佛) 부처님은 언제나 진실법(眞實法)으로서 중생(衆生)을 교도(敎道)하고 현교의 교주(敎主)인 응화신(應化身) 부처님은 언제나 방편(方便)으로서 중생을 교도하시느니라. 법신은 본래 방편(方便)을 쓰지 못하므로 때와 근기(根機)에 따라서는 당신이 곧 응화신(應化身)으로 화현(化現)하여서 방편법(方便法)을 쓰게 되니 그러므로 화신불(化身佛)은 방편법(方便法)을 쓰기 위해서 출세(出世)하신 부처님이라 만약 진실법(眞實法)을 쓰려면 도로 법신(法身)이 되어야 한다.

   같은 불교 안에 있어도 우리는 다른 종파나 다른 종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 같은 종단에 속해있거나 같은 절에 다니는 불자라 해도 저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신행의 중심도 다르다. 사람이란 원래 자기의 테두리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알지 못하는 데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문제는 오해와 편견을 갖기도 하고 자칫 잘못하면 혐오하고 배척하기도 한다.

   밀교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불자들 사이에서도 많이 낯설다. 낯설면 멀리하게 마련이고 어딘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틀리게 바라보기도 한다. 

   나 역시 밀교에 관해 아는 게 많지 않아 글을 쓰면서도 매번 조심스럽다. 불교사상과 불교역사에 있어 문외한이니 『종조법설집』의 한 문장 한 문장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몇 년 전 불교총지종 창종 50주년 기념사업에 참여하면서 종단이 추구하는 가치와 수행 체계가 신선하게 다가왔고, 무엇보다 종단의 구성원이 건강하고 신실하다는 데 호감을 갖게 되었다. 단편적으로 읽기는 했지만 원정대성사의 글에서 탁월한 식견과 앞선 지도력을 느낄 수 있었기에 턱없이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한 단원씩 톺아보며 그 사상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현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중의 근기에 맞게 방편으로서 팔만사천법문을 설한 것이고 밀교는 법신인 대일여래 부처님이 실상의 지혜를 있는 그대로 설한 것이라 한다. 설법의 주체와 설법의 내용이 현교와 밀교의 가장 큰 차이인 셈이다. 하지만 법신불이 방편법으로 세상에 나투신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니 근본으로 보면 둘이 아니다. 갖가지 방편의 언어로 법을 설한 것도 궁극의 진리를 가리키고자 한 것이니 이 또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한 가닥 갈증이라고 해야 할까, 마음속에 늘 미진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밀교와 관련하여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가 항상 궁금했다. 내가 불교를 삶의 가치관으로 삼고 평생 부처님의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맹세한 것은 무아, 무상, 연기, 인과의 위대한 가르침으로써 중생을 구제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별개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듯이 밀교사상의 근원을 부처님의 교화 여정에서 찾고 싶었다. 역사적 사실로써 밀교의 정통성이 증명되기를 바랐다. 

     

   <반야정로>라는 방송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불교 역사를 소개하는 시간에, 초전법륜에서부터 대승불교로 이어진 부처님의 설법과정에 이어 마지막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24명의 대보살들에게 칼라차크라의 가르침을 설한 것이 밀교라고 한다. 다른 많은 경전과 달리 이 밀교의 가르침은, 수많은 대중을 대상으로 설해진 것이 아니고 십지보살, 등각, 묘각의 경지에 오른 소수의 수행자에게 비밀리에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세세생생 중생을 제도하고자 원을 세워 수행을 완성한 보살이 실질적으로 보살로서의 다음 생을 준비하는 수행법이 밀교수행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 이은 밀교를 금강승불교라고 한다는 설명이다. 

   감았던 눈이 확 뜨인 느낌이었다. 초기불교, 대승불교, 밀교로 이어진 불교의 계승과 발전의 역사가 한 줄로 꿰어지는 것 같았다. 밀교가 왜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비밀리에 직접 전수되어야 하는지 알겠다. 왜 그렇게 많은 인계와 진언으로 삼밀을 닦아야 하는지도 이해되었다. 지금 이 몸 그대로 즉신성불한다는 말이 이상이나 당위가 아니라 그만큼 다 닦아서 보살의 원력으로 다음 생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의 서원이 막연히 구호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반가웠다. 지옥중생을 구제하고자 지옥문 앞을 지키고 있는 지장보살을 비롯해 수많은 불보살님들의 이야기가 확연히 믿어졌다. 반신반의했던 호법선신들의 이야기와 신화처럼 전해 내려오는 무수한 수행자의 환생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누구라도 원력이 크고 수행이 깊어지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가능하다는 것이 기뻤다. 

   밀교의 전통을 면면이 이어오고 있는 티베트의 달라이라마는, 밀교 수행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철저히 초기불교의 사상과 계율을 기반으로 하고 대승보살의 수행을 탄탄히 닦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기초 없이 밀교 수행법을 닦는다면 외도가 되기 쉽다고 경계한다. 원정대성사가 밀교의식을 설명할 때 의궤를 준수하고 염송을 줄이거나 진언을 남용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의궤수행을 잘못 하면 본인과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고 여러 사례를 들어 주의를 준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두루 섭렵하고 체득하지 못하면 심오한 밀교의 수행법을 소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섣불리 하다가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삼밀의 밀교수행법은 보살의 몸을 갖추고 금강법신을 이루기 위해 닦는 수행의궤이기 때문이다. 

   원정대성사는 말씀하셨다. 밀교는 여래가 자내증한 지혜의 법문이니 등각 십지도 들어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범부가 그 문에 들어가는 것이 쉽겠냐고 했다. 그만큼 밀교수행은 보리심과 자비심과 공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체험을 바탕으로 닦아야 하는 수승한 수행법이다. 중생이 끝이 없더라도 모두 다 건지겠다는 서원을 마음에 품은 자만이 궁극에 닦을 수 있는 수행이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닦고 체득한 수행자만이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불가사의한 수행력이다.

   단박에 깨치는 돈오와 차츰차츰 닦아가는 점수가 진리의 차이가 아니라 근기의 차이일 뿐이듯, 현교와 밀교의 차이 또한 우열로 바라보기보다는 발심하고 정진하여 마침내 다다라야 할 수행 순서로 바라본다면 수행의 목표가 보다 분명해지리라 생각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