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손발이 되어 동포를 수탈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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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3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8-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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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8-03 13:01 조회 1,775회본문
“일제의 손발이 되어 동포를 수탈하지 않겠다”
1937년 지나사변으로 군 교육비 위원회 서기 직 사임
독립군 투쟁의 땅 하얼빈에서 다른 운명의 길 걷기로
일제의 중국침략이 절정에 이르러 1937년 이른바 지나사변, 즉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중일전쟁 이듬해부터 일제는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을 공포하고 한반도의 노동력과 물자를 수탈하기 시작했다. 언론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장 폐쇄와 노동력 동원, 식량을 비롯해서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을 빼앗아 간 것이다.
학교에서는 일제 식민 교육이 강화됐고, 충성 어린 제국신민을 양성하라는 압박이 쉴 틈 없이 내려왔다. 일반 가정의 수저와 밥솥까지 공출이란 이름으로 약탈당했다. 집안의 가양주와 제주 담는 일까지 감시하며 식량을 약탈하는 일에 혈안이 됐다.
일제강점기 말단 행정관서인 군과 면 단위는 공출을 위해 주민을 압박하는 일을 업무로 삼았다. 대성사는 공출을 독려하는 업무와는 관련 없는 교육예산과 교육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심적 부담을 떨칠 수 없었다. 군의 서기로 일하는 한 일제의 정책을 따라야 하는 복잡한 심사가 있었다.
1940년 1월 14일 조선총독부는 조선징발사무세칙을 훈령 1호로 공포하였다. 전시 동원을 위해 사람과 물자의 징용 징발에 관한 사무규정으로, 조선군사령관 또는 사단장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징발할 수 있도록 조선 전역의 도지사들에게 자동차와 직공 인부 등의 조사표를 작성 제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선의 모든 관공서는 이에 따라 징발 가능한 인원과 물자를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에는 학생들까지 그 대상이 되었다.
이 훈령에 따라 각 지역에서 징발된 인력은 보국대,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끌려가 전쟁을 위한 강제 노역으로 혹사를 당했다. 홋카이도의 광산부터 군수공장까지 조선의 청장년들은 명분 없는 전쟁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을 지켜보던 대성사는 마침내 결단을 내려야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대성사는 금강관을 불렀다.
“내 긴히 상의할 일이 있소.”
“어떤 일입니까?”
“더 이상 군 서기 일을 못할 것 같소.”
“특별한 일이 생겼나요?”
“그런 것은 아니고 정세가 심상치 않소. 조선 땅의 물자들을 파악하고 있고, 징발할 수 있는 인력은 학생이라도 모조리 잡아갈 셈이오.”
“무엇 때문일까요?”
“아마도 곧 큰 전쟁을 벌일 것 같소. 교육비 위원회에도 학교 물자나 인원 징발을 준비하라는 언질이 있으니, 곧 일본인을 대신해서 조선 학생들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일을 할 수도 있겠는데 그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오.”
“그럼 어쩌시겠습니까?”
“군청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겠소.”
“생각해두신 일이라도 있습니까?”
“당장 일을 그만두면 징용 대상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니, 멀리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소만……”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 후 금강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옳은 길이라면 그리 해야겠지요.”
결국 대성사는 일제의 지시에 순응하지 않고 2월 8일자로 사직서를 제출하여 군 교육비 위원회 서기 직을 사임했다.
세상살이는 쉽지 않을지언정 일제의 전쟁정책을 이끄는 앞잡이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배운 대로 세상 이치 속에서 익힌 인간다운 삶의 길을 따라서, 일제의 손발이 되어 동포를 수탈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다시 광야에 서는 심정으로 신념을 굽히지 않는 대신 현실의 어려움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자신의 뜻으로 내일을 결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노예의 삶이며, 하루하루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성사는 가족을 이끌고 또 다른 운명의 길을 걷기로 했다.
군 서기를 그만두고 대성사가 눈을 돌린 곳은 북만주 하얼빈(哈爾濱). 당시에는 할빈 또는 하르빈, 하루빈 등으로 부르던 곳이다. 이곳 역시 우리 민족과 깊은 인연이 서린 곳이다.
고구려의 옛 영토이며 발해의 땅이었던 곳.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며, 대흥 안령 일대에서 시베리아의 얼음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독립군들이 투쟁하던 땅이기도 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러시아인들이 도시의 주인이었지만 러시아 혁명과 러일전쟁 이후 판세는 바뀌었다. 서양인들이 몰려와 작은 유럽을 이루어 동양의 파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공장과 은행, 회사 등이 줄이어 문을 열면서 북만주의 중심도시로 바뀌었다. 일제가 점령한 곳 중 일본과는 북쪽으로 가장 멀리 있는 땅이었다.
일제는 만주 지배를 굳건히 하기 위해 일본인과 조선인 이주정책을 폈다. 일본인들은 일확천금의 기회를 잡기 위해 만주로 갔는데 대략 150만 명 이상이 만주 일대에서 터전을 잡았다.
조선인들은 대부분 일제의 수탈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살길을 찾아 만주로 건너가고 있었다. 약 100만 명 정도가 만주 땅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대성사 가족이 서간도로 망명할 때는 총을 들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다시 만주로 눈을 돌린 것은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점차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혀 있었고, 공출과 인력 징발로 일제의 앞잡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만주는 그 압력을 덜 받는 곳이기도 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고 세상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만주는 새로운 기회와 번영의 매력이 있는 땅이었다.
만주국이 세워진 후 1932년부터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조선인들의 하얼빈 진출도 잦아졌다. 대성사 가족이 이주한 시기인 1940년 하얼빈의 대략적인 인구는 만주국 수립 후 40만을 돌파한 뒤 60만 명이 넘어서고 있는 대도시였다.
그중 조선인들은 10만 명이 넘는 규모로 민족 구성비가 적지 않았다. 그만큼 정착하기에 쉬운 편이고, 업을 도모하기에도 어렵지 않으리라는 점을 고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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