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행- 중국불교 유입의 길목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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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59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4-09-01 신문면수 8,9면 카테고리 문화기행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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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5 17:07 조회 2,192회본문
중국 감숙성 불교계를 돌아보며(1)
이 글은 법장원 연구원인 화령정사가 중국 감숙성 불교유적지와 현재 그 지역에서 불교의 역할을 이끌고 있는 중심사찰을 돌아보고 쓴 글이다. 감숙성은 실크로드로 가는 간선도로가 펼쳐져 있는 곳이기도 하며 중국에서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땅이다. 이곳에서 불교 전래의 흔적들을 볼 수 있는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있으며, 그 중에서도 돈황 석굴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유적지이다. 이 글은 감숙성의 불교 유적과 함께 그 곳에서 만난 불교계의 여러 인사들에대한 느낌을들여 3회에 걸쳐 연재된다.
중국불교 유입의 길목-감숙성
내가 불교동점의 초전지라고도 할 수 있는 감숙성을 방문하게 된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일이었다. 언젠가는 그곳에 한번 가봐야지 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이런 기회가 주어지자 평소에 이 곳에 대한 사전 지식을 좀 더 알고 있어더라면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이번 방문의 일차 목적은 나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종단에서도 여러 번 방문한 바 있는 중국불교협회 국제부 부주임 보정스님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보정스님은 한국에서 유학하고 돌아간 뒤 자기의 고향인 감숙성 난주에 「부사를 일으키고자 발원하여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보은사를 건립하여 지난 8월 7일에 낙성식을 가졌다. 낙 성식을 전후하여 축하객의 일부를 초청하여 감숙성 불교계를 돌아보도록 배려했는데 그 일행에 나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7월 27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상해로 해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난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상해 홍교공항에 도착해서 예약했던 난주행 비행기가 취소되었다고통보받았다.
백 명이 넘는 탑승객들 가운데 키도 크코 체격도 큰 중국 서북방지역 사내들이 큰 목청으로 항공사측과 한 바탕 소란 끝에 중국 돈 200원을 보상받고 북경으로 둘러서 난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사람들 말로는 중국항공사들의 이 정도 처리태도는 그래도 전 보다는 개선된 것 이라고 한다.
난주는 중국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지리적으로는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그 유명한 황하 상류가 이 곳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난주를 성도로 하는 감숙성은 실은 가장 변방 지역이며 낙후된 지역 이 하나이다;?젎조핪기후로 인하여 대부 분이 사막지대이며 생산활동도 미미하다.
이 곳 난주는 인구 300만으로 중국의 서북 지역에서는 서안 다음으로 두 번째 큰 도시이다. 난주는 중국에서는 유일하 황하가 시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도시이다. 황하는 그 물줄기를 수도 없이 바꾸며 범람했기 때문에 황하 유역에는 도시가 발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강’이라고 하지 않고 ‘하’ 라고 한다는 것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흙탕물을 보니 우리의 한강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도시 한가운데를 얌전하게 흐르며 2000만 수도권 인구의 젖줄 역할을 하는 한강! 그런 한강을 우리 스스로 몸살나게 학대하다니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감숙성은 정말 삭막했다. 황량한 산맥이 끝없이 펼쳐져있는데 인가도 보이지 않는다. 벌거벗은 수많은 산들마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가 그려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고, 골짜기마다 조금이라도 평지가 있는 곳은 개간한 흔적이 있는 것을 보니 저 먼 곳까지 도대체 누가 농사를 지으러 가나 싶었다.
비가 그리 많은 곳이 아닌데 내가 가던 날 마침 난주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항에는 남경 서하사불학원 부원장이자 교무장인 이해스님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해스님은 보정스님과 같이 감숙성 출신으로 같이 공부를 해서 불학원에 입학 하고 공부한 동기이자 친한 도반이다. 반 운 비와 함께 오는 손님이 더욱 반갑다고 나를 맞이해 주는 모습에 무척 흐뭇했다. 영상20도인 쌀쌀한 날씨에 놀라자 이 지역특성상 난주는 한 여름에도 비가 오면 춥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일정의 끝자락에서 가게 될 라부릉사가 있는 곳은 비가 오면 매우 추워서 담요도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다 음에는 한여름에 오더라도 긴 팔 옷을 하나쯤은 가져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지도 않은 쌀쌀한 날씨에 불편할 지라도 불교가 전해 들어온 길목인 이 지 역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비가 한 방울이라도 더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 하였다. 공항에서 난주 시내까지는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인데 도중에 인가는 거의 없었고 시내에 도착하니 저녁 9시이다.
무위 천제산 석굴의 위용
난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보는 난주 시내는 높은 건물이 가득한 매우 큰 도시였다. 보정스님이 창건한 보은사가 이 큰 도시에 자리하였다니 뿌듯한 마음이 들어서 돈황순례 후 난주로 돌아와서 참가하게 될 낙성식이 기대되었다.
우리는 무위를 향해서 출발하며 가는 도중에 천제산 석굴을 보기로 하고 아침 일찍 미니 버스를 타고 4시간 가량 서북쪽 방향으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에 보이는 주위 풍경은 끝없이 메마른 산 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나이테 모습의 조림을 한 흔적은 민둥산에 한 층 한 층 턱을 파서 4-50센티 정도의 작은 고랑을 만들어 작은 나무를 심고 그 작은 홈에 물기가 고이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하나같 이 말라 있는 모습이 눈으로 보기에는 썩 성공적이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 많은 산들을 일일이 사람들의 손길이 닿 아서 가꾼 과정을 거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지역정부와 주민들의 노력은 가히 눈물겨운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널려진 황량한 산 밑자락 이곳 저곳에 뚫어 놓은 동굴이 내 눈길을 자꾸 끌었다. 거의 모든 산에 크고 작은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듣기로는 햇살이 뜨거운 지역이라 농사를 짓다가 그 안에 들어가 쉬기도 하고 연장들도 넣어 두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동굴이 거의 산마다 있었는데 옛 날부터 저렇게 동굴 파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에 돈황을 비롯한 많은 석굴이 감숙 성에 산재해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으로 무척 인상적이었다. 길에서 보이는 산야의 대부분이 황량한 민둥산과 메마른 벌판이었지만 간혹 채소나 옥수수와 밀이 심어진 푸른 논밭이 있는 곳에는 민가가 몇 채 있었다.
또 완만한 산구릉에 펼쳐진 유채꽃밭 은 마치 크나 큰 노란 카페트를 깔아 놓은 듯 지평선처럼펼쳐진 들판 여기저기에 조각조각 펼쳐진 아름다움도 그 황량함 속에 잠깐 모습을 보였다. 끝없이 황량한 벌판의 비장함이 펼쳐지는 속에서도 지루한 줄 모르고 버스는 앞으로 달려나 갔다.
뜨거운 햇살을 뚫고 4시간 가량 달리니 멀리 눈 덮인 기련산맥이 보이고 큰 저수지가 나타났다. 마치 사막 가운데의 오아시스처럼 작은 부락이 보이고 나무들도 제법 있었다. 삭막한 산등성이만 보다가 싱싱한 녹색을 보니 반가운 느낌이 든다.
건조한 지역에서 식물이 자랄 수 있는 땅이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줄이야. 산 비탈에 난 자동차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호수 만한 저수지가 나오고 건너편에는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삭막한 산들이 펼쳐져 있었다.
저수지를 마주하고 오른쪽 벽에 천제산 석굴로 들어가는 돌 간판이 보이는데 그 곳으로 들어가 조금 올라가니 높이 28 미터, 넓이 10미터의 거대한 석가모니불상 이 벽면에 부조 형식으로 앉아 계셨다.
좌우로 보현과 문수보살 그 안쪽으로 아난과 가섭존자의 입상이 둘러져 있고 앞쪽 양옆으로 호법신장이 한 분씩 조성된 모습인데 아직은 인공이 그다지 가미되지 않은 이 석굴 앞에 서니 마치 시간이 정지되어 먼 과거의 어느 한 순간 속에 내가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 었다.
조금은 좁게 모셔져서 마치 좁은 방에 한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은 이후에 본 다른 석굴에서는 가지지 못한 특이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주위가 너무 호젓하고 소음 하나 들리지 않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처음으로 본 석굴이라 인상이 깊었을 것이다.
그 왼쪽으로 절벽을 따라 작은 동굴이 여러 개 보이는데 지금은 사다리나 난간이 없어 올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저수지를 만들면서 동굴에 물이 찰까봐 동굴의 불상이나 벽면에 그려진 벽화를 떼어내어 감숙성 박물관으로 옮겨갔는데 그 후에 보니 물이 그 동굴 높이까지는 차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박물관의 유물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 놓아달라고 무위 불교협회에서 반환요구를 하고 있는데 쉽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한번 훼손된 문화재는 복원하기가 극히 어려운데 이런 것들 을 좀 더 신중하게 처리했더라면 하는 아 쉬움이 남는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개 발에 급급해서 소중한 문화재를 파괴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후진국이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화재를 돌볼 여유가 없는 국가를 말하는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지금 현재로는 천제산 석굴에서 볼만한 것은 거대한 석가모니불 좌상 밖에 없는데 파괴되기 전의 천제산의 흔적 이나 몇 가지 유물 등이 입구의 박물관에 사진으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곳 천제산 석굴은 공개된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고 교통이 불편해 한버/찾아오기가 쉽자 않 아 우리나라 사람들도 갔다 왔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아마 한국 사람으로서 갔다 온 몇 사람 가운데에 나도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하면 서 괜히 뿌둣한 느낌이 들었다. 천제산 석굴은 규모 면에서는 이후에 본 다른 석굴들과 비교하여 별로 크지 않지만 석굴을 조성하기 시작한 초기의 형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며 벽면에 남아 있는 비취색의 물감 흔적들이 1500년이나 지난 지금도 무척 선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석굴은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지 아직 상업적인 냄새가 그다지 배어 있지 않고 사막 한 가운데의 제법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아 멀리 눈 덮인 설산과 바로 앞의 큰 호수 같은 저수지 물이 내다보이기 때문에 느낌이 색달랐다.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고 인적이 뜸한 이 곳에서 오직 신심 하나만으로 이렇게 거대한 불상을 정성들여 제작한 옛날 어느 불자들의 마음을 읽는 것 같아 숙연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천제산 석굴 입구에서 사진 몇 장 찍고 차를 돌려 무위로 향했다. 무위까 지는 약 100리 되는 거리라고 한다. 중국에 오니 땅이 커서 100리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게 느껴진다. 가는 도중에도 계속 해서 황량한 산들만 계속된다. 저 메마른 땅에 비라도 흠뻑 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마른 땅들을 보니 내가 목이 타는 느낌이 든다.
어쩌다 풀이 조금 난 곳에는 양들이 다닌 흔적이 있다. 그리고 작은 동굴들도 산자락마다 파여져 있고. 이런 풍광들이 무위에 도착하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감숙성을 지도에서 보면 왼쪽으로 기련산 맥이 있고 북쪽으로 합려산과 용수산사이를 사막지대가 길게 이어져 있는데 이 지대를 하서주랑이라고 한다.
황하의 서쪽에 있는 긴 복도라는 뜻이다. 이 곳을 따라 실크로드가 이어져 있다. 옛날 현장 스님도 인도에 불경을 가 지러 이 길을 따라 갔던 것이다.
그 도중에 무위, 장액, 주천가욕관 등이 있으며 그 끝에 돈황이 있다. 한의 무제는 곽거병이라는 장군을 시켜 흉노를 물리친 다음 하서사군이라고 하여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의 네 곳을 두고 서역지배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곳 무위는 옛날 에는 양주라고 불리웠는데 동진 16국 시대에 줄곧 양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동서양 교류의 요충 지로서 비단길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많은 민족들이 섞여 살게 되었는데 지금도 이 곳 무위의 소수 민족은 무려 26 개 종족에 이른다고 한다.
라집사의 재건과 유서 깊은 해장사
무위시에 들어서면 날고 있는 제비를 밟고 있는 청동말의 동상이 시의 상징처럼 우뚝 서 있다. 그 곳을 지나면 큰 성문이 있고 그 사이를 차가 통과 하여 중심가로 들어가게 된다. 주위의 풍광이 무척 고풍스러운 도시라는 느낌을 준다. 시내는 반듯하게 난 도로가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도시의 한 가운데에 역경가로 유명한 구마라집스님의 혀 사리를 모셨다는 라집사탑이 우뚝 서 있다
'우선 시내 한 가운데의 무위국제대주점 이란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점심을 먹은 다음 잠깐의 휴식을 하고 무위시에서 가장 유명한 곳 중의 하나인 문와 뇌대를 구경하러 갔다. 이해스님의 사형이자 이 지역 불교계를 대표하는 이지스님과 친분이 있는 무위시박물 관 관장님이 호텔로 오셔서 함께 동행해 주시고 설명을 해주셨다.
문묘는 명나라 때(서기 1439년) 세워진 곳으로 공자를 제사 지내고 많은 문인들 이 수학하던 곳이라고 한다. 궁궐의 모습을 본 따 지은 건물은 전체 구조를 대칭으로 배치해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그 중에서도 성묘와 문창궁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데 특히 문창궁에는 이 지역 출신의 명필들의 휘호가 천장어 빼곡하게 걸려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또 이 곳에는 몽고, 서하, 돌궐 등의 희귀 문자로 씌여진 비석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으며 무위시박물관에서도 이 곳을 특히 중점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곳 문묘에는 3만여점의 문물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뇌대라는 곳인데 1969년에 어떤 농민이 방공호를 파려다가 뇌대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우연히 대형 분묘를 발견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진 곳이 다. 원래 뇌대는 고대에 뇌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인데 그 아래에 대형 분묘가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서기 186년에서 219년 사이에 만들어진 이 대형분묘에서 온갖 귀중한 부장품과 함께 제비를 밟고 있는 청동말도 발견되었던 것이다.
나는 제비가 말에 밟혀 놀라서 뒤를 돌아보고 제비를 밟은 말은 이게 뭐지? 하 는 표정으로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고 있는 역동적이고도 유머러스한 장면을 포착 하고 있는 이 청동상은 이제 무위시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약동하는 전 중국의 기상을 상징하는 심볼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곳 감숙성은 주식이 국수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랬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국수만 먹었다. 물국수, 비빔국수, 볶은 국수 등등 온갖 국수에 채소를 곁들여 먹었는 데 고추 튀긴 것도 많이 나왔다.
감숙성의 손국수는 중국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같은 국수라도 각기 다른 형태로 만들어져서 눈으로 보이는 모양뿐만이 아니라 입 속에 씹히는 느낌도 달랐다. 이해스님은 일정내내 온갖 다른 국수를 맛 볼 수 있도록 신경써 주시고 식탁에 올라 오는 모든 야채로 만든 음식들은 일정내 내입 속이 상큼하고 몸을 가볍게 해주어서 즐거웠다.
또 하나 신기한 것은 넓은 영토를 가진 중국은 적어도 서너시간이 나는 시차를 가지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동서 끝을 막론하고 전체를 표준 시간을 하나로 통일하고 있기 때문에 서쪽에 위 치한 이곳 무위만 해도 9시나 되어야 겨우 땅거미가 내려 앉는다.
물론 아침 8시가 되어도 새벽기운이 감도는 것은 물론이고. 어쨌든 10시쯤 되어 어둑어둑할 때 거리를 나서봤더니 여름이라 그런지 시민들이 대낮처럼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바람을 쐬고 있다. 이 지방은 덥다고 들었는데도 건조한 기후라 그 다지 덥지는 않았다. 마침 보름이 가까워 둥근달까지 덩실 떠오른 서역의 한 유서 깊은 변방 도시 한 복판에 서 있다는 느 낌이 특별한 감회를 더해 준다.
다음 날은 감숙성불교협회 부회장이며 해장사와 라집사의 방장이기도 한 이지스님의 초청으로 그곳을 방문했다. 라집사에는 구마라집 스님의 혀사리가 봉안된 탑이 있을 뿐이었는데 이지 스님이 발원하여 현재 대규모의 대웅전을 건립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경각을 포함하여 앞으로 건립될 라집사를 축소하여 만든 모형을 통하여 그 규모를 상상해 보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지 스님은 속세 나이로 아직 40도 되지 않았으며 작은 체구를 지니고 있는데 그 원력만은 정말 대단하다. 무위시 한복판에 관공서를 모두 몰아내고 라집사를 중창하려는 의지를 보니 현대중국불 교의 역동성이 느껴지는 듯 하다. 구마라 집 스님은서기 383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대장군 여광을 시켜 구자를 공격해 빼앗아 왔는데, 후에 여 광이 후량(썌)의 왕이 되자 수도를 이 곳 무위에 세우고 구마라집 스님을 장안으로 모시고와 국빈으로 대우하며 여러 경전을 번역하게 하였다.
구마라집 스님은〈아미타경〉,〈성실론〉〈중론〉등 경률론 74부 380여권을 번역함 으로써 중국불교가 획기적 도약을 하는데 일조했다. 중국불교의 물꼬를 틔운 개척 자라고도 할 수 있는 구마라집 스님의 혀 사리가 모셔진 라집사가 건립되므로써 구 마라집 스님의 공적을 기리고 후학들이 불교학을 더욱 융성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라집사에서는 마침 왕생보불 등의 법회가 있어 참석했는데 좌종, 목탁, 북 등 여러 가지 법구를 사용하여 법회가 진행되었는데 대단히 요란했다.
신심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법회시에 다양한 법구를 사용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불과 법구 소리에 맞추혀 계속해서 절을 하거나 아니면 상체를 일으킨 채로 꿇어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이렇게 많은 신도들이 법당 가득히 모여서 장엄한 법회를 거행하는 것을 보면서 남의 나라이지만 같은 불교도로서 흐뭇한 마음 이 들었다. 중국불교는 젊은 스님들의 주 도 하에 거대한 불사들이 활발하게 이루 어지고 거기에 맞추어 정부의 지원도 비교적 원활한 것 같았다.
앞으로 불교도 중국이 다시 종주국의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불교는 이제 사회에 대한 영 향력도 많이 떨어지고 젊은 불자들이 양산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불교지도자들이 기득권에 만 안주하지 말고 더욱 활발하게 포교사 업을 펼쳐나가는 것을 본분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법회를 마치고 저녁에는 해장사에 초청을 받고절음식 대접을 받았다. 해장사는 동진시대인 4세기에 건립되었으며 현장스님이 경을 가지러 인도에 가다가 이 곳 해장사에 들 어 설법했다고 한다. 원대에는 티벳 불교의 영향도 받았고 명대에는 장경각을 지어 대장경을 보존했는데 지금은 그 대장경들이 무위 문묘에 보존되어 있다고도 한다.
또 명대에 대규모로 증축되었지만 1927년 지진으로 많이 파괴되었고 또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대부분이 파괴되 었지만 이후 정부에서 계속 지원하여 지금은 옛날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고 한다.
황폐한 지역에 세워진 도시에 푸른 녹음이우거진 역사 깊은 해장사는 절 앞쪽으로 호수가 있어서 물과 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고찰 모습을 보여주어 그 소중함을 더욱 느끼게 하였다.
사찰의 마당과 전각의 곳곳이 다 스님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당에 깔린 연꽃모 양을 한 벽돌은 스님들이 직접 구워서 바 에 깔았다고 하고 저녁식사에 나온 지의 꼭지도 버리지 않고 조리되었는데 방장인 이지스님이 일러주신 방법이라고 하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사로운 것에서부터 아까고 소중히 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면서 밝은 중국불교의 미래를 보는 듯 흐뭇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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