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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불교를 지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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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59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4-09-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총지칼럼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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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종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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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5 15:56 조회 2,1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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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불교를 지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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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고려대학교 BK21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불교 연구로 철학 석사
스토니부룩대학교 불교 연구로 철학 박사

한국 불교는 보살불교라고들 합니다. 보살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여자 신도들을 지칭하는 말로 그 의미가 변하게 되 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 불교에는 사실상 여신도들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 니다. 여신도들도 그냥 여신도가 아닙니 다. 모두 나이 많은 할머니 신도들입니 . 그렇다면 한국 불교는 할머니불교라고 하는 것0| 더 적합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실제 신도의 9할 이상이 50대 후반에서 6,70 대 할머니들이라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국 불교의 쇄락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 신도 가운데 젊은이가 없다는 것은 한국 불교의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 다. 지금의 6,70대 할머니 신도들이 모두 돌아가신 20년, 30년 후에는 신도 수가 지금의 10분의 1밖에 안 될지도 모릅니 다. 오늘날 한국의 농촌이 피폐해 가고 있다는 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 농촌에 젊은이들이 없다는 사실입 니다. 한국 불교는 한국 농촌보다 더 미래가 없어 보입니다. 농촌에는 나이는 많지만 그래도 남자들이 있는데 한국 불교 신도 가운데는 젊은이 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남 자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신도들이 모두 할머니들 이다 보니 불교의 대중법 에는 생기가 없습니다. 사흥서원을 함께 외워도 그 소리가 마냥 늘어지기만 하고, 반야심경을 함께 외워 도 웅얼웅얼 탁하기만 합니다. 각종 행사도 단조롭기 짝이 없습니다. 목탁치고 염불하고, 목탁치고 염불하고, 나무아미 타불, 나무아미타불 외고 또 외고 되풀 이할 따름입니다.

신도들끼리 모임이라도 만들어 놓고 보면 신도회가 아니라 노인회가 되고 맙니다. 신도회 회원들이 사찰에 모여서 무슨 회의를 하거나 하는 경우를 보면 마치 경로당 회의 같습니다. 그러니 신 도회가 활발히 움직일 리가 만무합니다. 사찰이 잘 되려면 훌륭한 승려가 좋은 설법으로 신도들에게 지적인 자극을 주 어야 하겠지만, 그 이전에 필요한 것이 신도들이 서로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자발적으로 설법을 들으러 절에 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도들이 모두 할머니들이다 보니 이것이 되지 않습니다. 할머니들끼리 모여서 체육대회를 하겠습니까? 등산을 하겠습니까? 사회봉 사활동을 하겠습니까? 오로지 하는 것이라곤 중국서 수입한 미꾸라지나 자라를 방생하기 위한 여행을 함께 하는 정도입니다.

또 오늘날의 사회는 각 종교 단체들의 사회봉사가 활발하지만 신도들이 모두 할머니들이다 보니 불교계는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힘듭니다. 머지않아 봉사를 받아야할 분들이 어떻게 사회봉사를 하겠습니까?

신도들이 할머니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는 것은 단지 신도 분포상의 문제에 그 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한국불교의 근 원적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타 종교의 어떠한 신도들보다도 신심이 뛰 어난 할머니 신도들을 무시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 분들이 한국불교 신도의 전 부가 된 것은 한국 승려들의 지적인 자 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승려들의 지적 자질이 부족 히기 때문에 할머니들만이 절에 오게 된 것입니다. 신도들로부터 삼배의 절을 받는 승려들이 지적 자질이 부족하고 하면 대단히 불경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불교 승려들 가운데는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도 있 습니다만 일반인들을 교화하는 데 필요 한 지적 자질을 갖춘 사람은 그 수가 매우 적은 것이 문제입니다. 지적으로 뛰어난 승려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그 들은 현대의 학문과 문화 교양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서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설법을 못 하기는 매 일반입 니다.

이렇게 승려들의 지적 자질이 떨어지 다 보니 신도들에게 올바른 설법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머리가 깨인 사람이거나, 따져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승려들의 무식한 설법을 들으려고 하 지 않습니다. 도대체 알아듣지 못할 말만 하다가 혹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있는가 싶으면 황당무계한 인과응보 설이나, 하나마나한 도덕적 훈계를 설법 이라고 하는 사람을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은 믿고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비판의식 대신에 참고 순종하는 데 익숙한 분들만 설법하는 자리에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6,70대 할머니들은 인내하고 순종하는 것을 평생 배워 온 분들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의 말씀에 순 종하고, 결혼하여서는 남편의 결정에 순 종해 온 분들입니다. 인내와 순종에 훈 련된 분들이기에 아무런 알맹이도 없고 논리적 설득력도 없는 승려들의 설법을 듣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분들은 설법을 들으려고 절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공을 드리러 가는 것 입니다. 설법은 그냥 승려들이 하고자 하니까 그들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차원에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거나, 그 소리가 그 소리인 지루한 설법이지만 인내 심을 가지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 글깨나 읽었다는 승려들은 종종 신도들이 무식 하여서 심심미묘한 참된 법을 설법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승려들이 궁극적인 깨달음의 본질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하면 그것은 말이 될 것입니다. 석존도 진리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아닙 니다. 지금 문제는 승려들이 기초적인 교리조차 설명하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깨달음의 궁극적 경지는 불립문자의 세계이지만, 교화의 출발은 어디까지나 언설을 통한 설법입니다. 때문에 석가는 갖가지 인연 비유로서 사성제와 연기법을 비롯한 많은 교리 들을 설명하였습니다. 왕이 오면 왕이 알 들을 수 있게 설명하고, 상인이 오면 상인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고, 아낙 네가 오면 아낙네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고, 처녀가 오면 처녀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였습니다. 또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가춘 철학자가 오면 그가 자신의 오류를 깨닫고 감복할 수 있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를 지칭하는 별명 가운데는 세간해 라는 말도 있습니다.

믿음과 깨침, 혹은 신앙과 이성이라는 말로 양분법적으로 말하자면 불교는 깨 침의 종교이며 이성의 종교입니다. 그런 데 승려들이 설법을 제도로 못 한 결과로 이성적 교화를 통해 불교 신도가 된 이들이 없고, 오로지 소박한 신앙심으로 절을 찾는 할머니들만 절에 남았습니다. 이것은 불교 자체가 잘 못되어 가고 있 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성은 없고 신앙 만 있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절에는 할머니 신도들밖에 없지만 절밖에는 다양한 계층의 남녀 예비 신도군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의외로 불교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적으로 예민하고 선량한 사람일수록 그 어떠한 종교나 철학보다도 불교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한결같은 바람 이 있습니다. 좀 쉽게 불교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불교교리는 참 훌륭한 것 같은 데 쉽게 이해시켜 주는 책도 없고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쉽고 말이 되는 설법으로 하루 빨리 이들이 절에 오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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