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행- 중국불교 유입의 길목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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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61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4-11-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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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6 06:36 조회 2,070회본문
중국 감숙성 불교계를 돌아보며(3)
이 글은 법장원 연구원인 화령 정사가 중국 감숙성 불교유적지와 현재 그 지역에서 불교의 역할을 이끌고 있는 중심사찰을 돌아보고 쓴 글이다. 감숙성은 실크로드로 가는 간선도로가 펼 쳐져 있는 곳이기도 하며 중국에서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땅이다. 이곳에는 불교 전래의 흔적들을 볼 수 있는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으며, 그 중에서도 돈황 석굴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유적지이다. 이 글은 감숙성의 불교 유적과 함께 그 곳에서 만난 불교계의 여러 인사들에 대한 느낌을 곁들여 3회 연재 중 마지막 글이다.
실크로드의 요충지-돈황
천불동 막고굴의 신비를 찾아
유림석굴을 참관하고 기련산맥을 왼쪽에 끼고서 석양빛을 받으며 돈황을 향해 달려갔다. 한 여름에도 눈이 덮힌 기련산 맥은 난주에서부터 계속해서 이곳 돈황까지 이어진다. 기련산맥에서 눈 녹은 물이 내려와 그나마 사막을 약간은 적셔준다고 한다. 한참을 달리다가 보니 녹지대도 많이 나오고 농경지가 많이 나타났다. 특히 목화밭이 많이 보였고 옥수수 밭도 많았 다.
삭막한 사막만 보다가 이렇게 녹지대가 나타나니 갈증이 좀 가시는 느낌이 든다. 녹지대가 많아지는 것을 보아 사막의 오아시스 돈황이 가까워지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이렇게 유림석굴을 나와 세 시간 정도 가니까 왼쪽으로 돈황 비행장이 보이고 다시 모래 산들이 나타났다. 저 모 래산에 그 유명한 천불동 막고굴이 있다고 했다.
내일 드디어 저곳을 가보는구나 생각 하니 가슴이 설레인다. 몇 킬로를 더 지나니 돈황 시내가 나타났다.
시내 한 복판의 로터리에 돈황의 상징 인 반탄비파상이 10여 미터의 높이로 우뚝 서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반탄비파상은 비파를 등에 짊어지고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리고 흥겹게 노니는 천녀를 묘사한 저인데 돈황 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을 대부석으로 조각한 것이다. 역동적인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돈황시의 상징으로 삼은 것 같았다.
우리가 도착한 것이 거의 오후 6시경이 었는데도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중국은 지역이 넓어도 시차를 적용하지 않고 표준시간을 하나로 통일해 놓았기 때문에 이곳 돈황은 해가 늦게 진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고 나오니 9시가 되었는데 그제서야 겨우 해가 넘어간다. 호텔을 나와 시내의 중심이 되는 양관로를 따라 야시장 구경을 갔다.
수많은 관광객이 거리를 누비는데 한국 인 관광객도 상당히 많았다. 인구 13만의 돈황시가 막고굴 하나로 먹고사는 것 같다. 야시장에서는 돈황 막고물의 벽화 복제품이나 조각 등 기념품을 팔기도 하고 회족들이 양고기를 구워 파는 곳도 많았다.
이곳만 해도 회족이나 위글 족 등 소수 민족이 상당히 많이 산다고 했다. 나도 돈황 벽화의 반탄비파상과 관세음보살을 모사한 작품 몇점을 샀다.
돈황은 중국 본토와 서역, 나아가서는 중앙 아시아로 이어지는 요충지였기 때문 에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이 지역을 서역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고 한 무제 때는 여기에 하서절도사를 두었다.
그러나 중국 왕조의 힘이 약해질 때는 늘 이민족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 에 중국적인 것과 이국적인 것이 혼재해 있는 특이한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돈황 막고굴의 벽화 분위기도 그러한 혼재 의 양상을 띠고 있다.
돈황이 더욱 유명해 진 것은 물론 남쪽 교외의 이른바 천불동으로 불리는 막고굴 때문이었다. 막고굴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저 군사적 요충지에 불과 했으나근세에 들어 동굴이 외국인들의 손에 약탈되면서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 게 된 곳이다.
이제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막고굴을 보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그 옛날 돈황이 흥성하던 때를 연상케 한다. 옛날의 돈황 시내의 모습은 어땠을까? 마침 오늘이 음력 16일이라 달이 매우 밝다. 사막 가운데의 오아시스에서 쳐다보는 달이 무척 새삼스럽다.
별도 총총해서 마치 손에 가득 움켜쥘 것 같았다. 옛 사람들도 수천리의 사막길 을 달려와서 이렇게 돈황의 달과 별을 바라보며 하루를 묵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흠씬 목을 축이고 모래 먼지를 씻어 지친몸을 추스르고 마음껏 먹고 취하면서 하루 저녁을 즐겼으리라.
다음날인 8월 2일 아침 드디어 막고굴을 향해 떠났다. 막고굴은 돈황 시내의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명사산의 동쪽 단층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총 길이 1.6킬로미터에 걸쳐서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주로 개발된 곳은 남 쪽 벽면으로 492개의 동굴이 있으며, 최근에는 북쪽의 동굴도 개발되어 현재 280여개가 발굴되어 있다.
옛날에는 천불동이라 했는데 아마 사막의 거친 모래바람에 많은 동굴이 매몰되고 파괴되어 이 정도가 남은 것 같다. 막 고굴은 대략 서기 366년 전진 시대 부터 만들어져 북위, 수, 당, 송, 원, 명, 청대에 까지 계속해서 축조되었다고 한다.
16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던 막고굴이 발견된 것은 1900년경에 왕원록이라는 도교의 도사에 의해서였다. 이 왕도사는 말이 도사이지 그다지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혜가 크게 있 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어느 날 이곳에 와 서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 거기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동굴 벽면에 구멍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고 그 구멍을 계속 파보니 그 안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전적 들이 두루마리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훗날 세계를 떠들썩 하게 한 장경동으로 알려진 동굴이다.
이 왕도사는 돈황현청에 그 사실을 보 고했더니 관공서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 고 그저 적당히 보관하라는 말만 들었다.
그래서 왕도사는 사람들에게 두루마리도 보여주고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의식 걱정 없이 살고 있었는데 1907년 영국인 영국인 스타인이라는 사람이 이곳을 찾아 왔고 왕도사는 이 영국인에게 자기로서는 엄청난 돈을 받고 그 두루마리들을 넘겨 주었던 것이다.
또 이듬해는 프랑스인 페리오가 와서 꼼꼼히 살펴보고 옮길 수 있는 만큼은 가 져갔는데 이 페리오라는 사람은 한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그 두루 마리들 가운데에서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가져갔다.
따라서 뒷날 밝혀진 것이지만 스타인은 한문에 대한 지식이 없어 마구잡이로 가져갔고 페리오가 가져간 것은 학술적으로 훨씬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뒤 일본원정대나 러시아인들이 나머지를 모두 들고 가 버렸다.
이들이 가져간 두루마리 경권들이 훗날 학술적으로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지는 이들도 미쳐 몰랐다. 왕도사라는 어리석은 중국인 하나에 의하여 중국은 어마어마한 보물덩어리를 맥없이 외국인 약탈자들에 게 넘겨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막고굴을 들어가는 진입로에 왕원록의 무덤 이라고 해서 탑을 세워 놓았는데 도대체 왕도사가 무슨 공로가 있었다는 건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었다.
9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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