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치기 농군의 가을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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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61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4-11-01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아제아제바라아제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선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총무국장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6 06:47 조회 2,061회본문
가까운 미래(?)에 남편과 나는 귀농을 할 생각으로 작년 가을 지리산 자락에 삼백평 남짓 되는 작은 밭을 하나 마련했다. 농사용으로야 턱없이 부족한 규모지만 집한 체를 올리고 터밭을 일구기에는 불편함이 없을 정도는 되리라는 생각 에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었다. 그런데 봄이 되 자 그 밭에 어떤 작물을 심어야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거리가 워낙 먼 까닭에 어지간한 작물들은 관 리부족으로 한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전멸할 것 이 뻔한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구입 한 첫해부터 땅을 놀리는 것도 마음이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여러 사람의 조언을 구 해서 손이 가장 덜 가는 작물을 골라 늦봄, 절기 의 마지막에 파종을 감행했다. 고구마와 콩, 팥 삼형제였다. 이 놈들은 비만 적당히 와주면 잘 자란다니, 업무차 가끔 실상사를 방문할 때마다 잠깐씩 돌봐주면 어지간히 자랄 수는 있겠구나 싶었다.
연일 무더위가 지속되던 여름 어느 날 업무상 참석해야하는 회의 때문에 실상사에 내려 갈일이 생겨서 걱정스런 마음으로 밭에 올라가 보았다. 아니다 다를까 고구마 잎은 모두 말라비틀어져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다. 회의를 마친 다음날, 살아날지 죽을지 모를 고구마들을 위해 남편과 나는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물을 날라야 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며칠은 끙끙 알았던 것 같다. 늦은 밤까지 물을 나르면서 나는 고구마를 많이 먹 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저 뙤약볕에 시들어 가는 작은 생명들이 안타까웠다.
자신이 뿌린 생명을 보살피는 행위는 그 대상 이 비록 자식이 아니라 둔탁해 보이는 식물을 위 한 것일지라도 내 마음속에서 비슷한 감정들을 일으켰다. 그런데 기특하게도 그 고구마와 콩, 팥 삼형제가 지난여름을 무사하 버텨주는 바람에 드 디어 어제새벽 온 식구가 가을걷이를 하러 지리 산으로 향한 것이다. 아이들과 친정 부모님, 남동 생과 남편 그리고 나, 온 식구가 총 출동했다. 밭에 도착한 가족들은 일단 막걸리 한사발로 목을 축이고 나서 열심히 고구마를 캤다.
작년까지 논으로 사용하던 땅에 올해 처음으로 밭착롤을 심은 터라 수확량은 기대하지 않았었는 데 땅속에서 몸집을 불린 채 잠들어있는 고구마 가 생각보다 많았다. 한참 웃고 떠들면서 일을 하던 어른들이 힘이든 때문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조용해졌다. 나도 입을 다물고 호미를 쥔 손에 힘을 주면서 고구마를 찾아 밭이랑을 뒤졌다.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와중 에 모든 생명 종들이 보편적인 동질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고구마의 크기와 모양에 관계없이 어떤 대상을 다른 것 들과 구분해서 고구마라는 동일한 명칭으로 부를 수 있게 하는 근거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보편의 실재성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 하고 우리의 지성사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학창시절에 나 자신을 끝도 없는 사유의 낭떠러지로 밀어 넣었던 생각꺼 리이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 레스 이후 중세를 거치면서 확고한 사실로 굳어 져있던 보편의 실재성이 1285년 런던 태생 프란시스꼬회 수사인 옥캄이 “보편자는 오직 영혼 안 에만 있고, 사물 안에는 없다는”는 주장을 하면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보편자는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허구에 지나지 않는 추상작용을 통해 생겨날 뿐이다”라는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이 단적인 견해를 밝힘으로써 개념을 통해 형이상학 적인 초월에 이를 수 있다는 뿌리 깊은 플라톤주 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이후 유명론의 물고를 텄다. 그리고 그 논제는 다시 언어철학으로 이어졌 다.
인도에서는 훨씬 앞서서 이 보편의 문제가 중요한 철학적 종교적 논쟁대상이 되었다. 불교가 유명론적인 입장에 서있다면 니야야, 바이세시까, 미망사, 베단타등 일명 정통주의 입장을 고수하는 학파는 실재론적인 입장을 취했다. 게다가 인도에서는 철학이 사변의 영역만을 다루는게 아니라 실천수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긴 시간동안 심각한 논변을 주고받았다.
부처님께서 무상, 고, 무아라는 세 가지 진리를 밝히신 이후로 불제자들은 보편을 궁극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의사소통을 위한 약속된 기호의 가치로만 여겼다. 더 나아가 보편이라는 틀을 가지고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사실자체를 지혜가 없는 상태로 보아 원초적인 번뇌로 규정 하고 열반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극복해 야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후대에 유식학파는 이를 변계소집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내 마음속이 보편자와 개별성의 문제로 한참 소란스러울 때 남편이 아이들을 불렀다. 고구마를 캐다가 겨울잠에 들어간 개구리를 발견한 것이다. 아이들이 신기해하면서 개구리를 안전한 곳에 땅을 파고 다시 묻어주었다. 잠시 후 남편이 또 아 이들을 불렀다. 이번에는 동면중인 도마뱀 한 쌍 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접근하자 한 마리는 땅 속으로 더 깊이 숨어들었지만 온몸이 노출된 녀석은 서둘러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바람에 도마 뱀이 그만 서로 헤어지게 되어 모두들 미안하고 안타까워했다.
오후 네 시쯤 수확한 고구마와 콩, 팥을 차에 싣고서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졸음을 견뎌가며 운전하느라 정신없던 남편이 갑자기 한마디를 툭 던졌다.
밭에 겉흙을 만들기 위해 유기농 퇴비를 뿌리고 트랙터로 갈아놓으려고 했는데 농약을 안해서 인지 밭에서 겨울을 나는 생명들 때문에 그 일을 내년 봄으로 미루어야겠다는 생각이란다. 나는 퇴비를 많이 주면 지렁이를 너무 자주 마주칠까봐 걱정이 된다고 응수했다.
휴게소에서 남편과 아이들이 잠시 눈을 부치는 사이 고구마 나누어줄 곳을 짐작해보았다. 아홉 상자를 캤는데 마을 분들께 벌써 세 상자를 풀었고, 지난여름 밭에 풀매준 친구들에게 한 상자, 시댁과 친정에 각각 한 상자씩, 그리고 함께 이주 할 친구에게 한 상자를 주고 나면 내 몫으로는 두 상자만 남게 될 것 같았다.
그간 고구마 오십 상자를 사고도 남을 비용을 들여 지은 농사인지라 셈을 따지자면 적자가 이 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땀의 결실을 나누는 뿌듯함 때문에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차한잔을 마셨다.
〈김선미/인드라망생명공동체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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