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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적 계율이 승려들을 자기 분열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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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62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4-12-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총지칼럼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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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종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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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6 07:46 조회 2,1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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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적 계율이 승려들을 자기 분열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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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고려대학교 BK21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불교 연구로 철학 석사

스토니부룩대학교 불교 연구로 철학 박사



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엄격한 계율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계율이 엄격한 것은 불교가 이성적 자각과 수행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원래 가르침은 신이나 신을 매개하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권능도 부정한다. 오로지 이성적 자각을 통한 개인의 철저한 자기완성을 통해서 만이 궁극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계율의 실천은 자기완성의 일차적인 관문의 역할을 한다. 모든 불교 수행은 삼학, 즉 계율, 선정, 지혜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삼학 가운데서도 계율의 실천이 가장 기초가 된다. 계율의 실천 없이는 선정도 불가능하고, 지혜도 얻을 수 없다. 자발적인 계율의 실천 없이는 한 발짝도 자기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자비로운 신이 있다면 탐욕스럽고 나약한 인간조차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도를 통해 용서를 빌고 구원을 청하면 절대의 권능으로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줄 수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은 넓고 넓은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나 자신만이 나를 해 탈시킬 수 있다. 한 번이라도 계율을 어기면 그만치 나의 자기완성은 퇴보하거나 멈추고 만다. 스스루 마음을 다잡고 재차 나아갈 수는 있으나, 그 누구도 내가 계율을 어기는 데서  비롯된 퇴보와 멈춤에서 구원해 없다.

계율의 실천이 이처럼 중요한 것임에 도 불구하고 많은 불교인들이 계율을 제대로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우습게 보기까지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불교인들이 대승불교의 진속불이법과 선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속된 이해이며, 둘째는 인간의 욕망을 공공연히 예찬하는 자본주의 시회의 문화적 환경이다.

진리와 세속이 둘이 아니라는 말에는 승단이라는 '특수한 사회에서 고립된 삶 을 살고 있는 승려들의 신비적이고 초월 적인 경험으로 깨달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 말은 한편으 로는 세속인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다른 한편으로는 승려들에게 일상의 삶에서 유리되지 않은 균형 잡힌 삶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그런데 이 진속불이의 논리가 중국에서 도가철학의 영향을 받은 무심의 사상과 결합되면서 심하게 왜곡되었다. 마음에 거리낌만 없으면 계행에 어긋나는 저속한 행위조차 문제가 되 지 않는다는 사고로 변질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왜곡은 무심을 강조하는 선 불교에서 더욱 심해져 계행에 집착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소치이며, 계행에 연연 하지 않는 무애자재의 세계가 깨달음의 세계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로까지 발전 한다.

더욱이 선승들은 일반 사회와 유리된 산 속의 선방, 심지어는 선방에서조차 유리된 고립된 암자에서 참선 수행을 하는 탓에 항상 비상식적인 사고에 빠져들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실제로 일부 승려들이 계행을 안 지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상식인의 예법에도 어긋나는 괴팍한 행동을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욕망을 긍정하는 것을 넘어서 예찬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불교인들이 계행을 실천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전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이외의 거의 모든 사회에서는 도덕적 이념을 통해서 욕망에 일정한 통제를 행하였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불 교의 계율 자체가 사회의 도덕적 이념과 근본에서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계율은 그 사회 일반도덕률의 이상적 표 준이었다. 승려는 일반인보다 조금 더 욕망을 억제하는 사람들이지, 전혀 이질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불교의 계율은 사회 일반의 가치관과 서로 모순된다. 전자는 욕망을 철저히 부정하고 후자는 욕망을 예찬한다. 이 이러한 생명력으로서의 욕망을 부정하는 도덕률은 낡은 이념의 탈을 쓴 위선으로 본다.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자는 위선자이거나 생명력이 약화된 불구자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 계율을 지닌 승려가 일반인들의 가치관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가치관에 이끌려 계율을 파기하게 되었다.

많은 승려들이 욕망을 긍정하는 자본 주의의 세속적 가치관에 이끌려 계율을 파기하고서도 이를 해괴한 불이론과 무애자재의 논리로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변명이 자기를 속일 수는 없다. 결국 승려들은 자아의 분열을 '일으켜 자기파괴적 행위를 하게 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엄격한 계율의 실천을 맹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이러다 보니 종법상 비구계를 지키는 비구승만을 인정하는 종단인 조계종 승려들 가운데서 자아분열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엄격히 계율을 실천하는 승려를 찾기 힘든 실정이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문화적 환경에서는 특별한 천성을 타고나지 않고서는 불교 의 전통적인 계율을 완벽히 지킬 수 없다. 승려들의 이러한 자아분열을 막고 교 단을 건전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계 율의 현실화가 필요하다.

비구계와 대중계로만 나뉘어져 있는 계율 체계를 좀더 세분화하여 비구계를 수행승을 위한 계율과 교화승을 위한 계 율로 나누거나, 아니면 비구계를 의무적 으로 지켜야할 것과 선택적으로 지킬 것으로 나누는 것과 같은 혁신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비구계를 완벽히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상당수 승려들이 계율의 세계와 욕망의 세계의 정면 충돌을 겪으면서 자기 분열을 이루지 않고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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