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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중국불교 유입의 길목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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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61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4-11-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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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6 06:44 조회 1,4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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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중국불교 유입의 길목을 따라
중국 감숙성 불교계를 돌아보며(3)

8면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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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보물 장경동 전적

외국인에 의해 약탈당해

어쨌든 이들 외국인이 가져간 자료는 모두 4만권이나 되는데 운반도중에 분실 과 훼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예를 들면, 짐을 나르던 인부들이 두루 마리 한쪽을 쭉 찢어서 담배도 말아 피우 고 박스의 구멍도 메꾸고 하는 식으로 그 귀중한 자료들이 무지로 인해 영원히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이들 자료의 내용은 고대의 불교관련 전적들이 주종을 이루고 역사, 지리, 문 화, 미술, 언어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감춰진 사실을 알려주는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신라의 혜초 스님이 쓴(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것도 이들이 가져간 자료 안에 있었던 것이다. 돈황 장경동의 이러한 자 료들은 불교학뿐만 아니라 동양학, 그리 고 세계문화사 전반에 대한 기존의 연구 를 뒤집어 놓는 획기적인 자료들이었다.

이제 돈황 막고굴 안에는 이러한 자료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벽화와 진흙으로 만든 불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러나 이러한 벽화와 불상도 불교와 불교 미슬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귀중한 자료들이다.

최근 중국정부에서는 돈황을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해 놓고 돈황 연구를 중국 주 도하에 이끌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돈황은 중국에 있지만 돈황 연구는 외 국에 있다.”는 말처럼 지금까지는 모든 문헌이 외국에 있어 외국인 위주로 돈황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복사기술의 발달로 외국 문헌자료를 충분히 수집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도 이제는 돈황 연구를 본격 적으로 할 것이라고 한다.

명사산은 아주 가는 모래로 이루어진 산인데 밟으면 뽀드득뽀드득하는 소리가 울리기 때문에 명사산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과장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바람에 모래가 쓸려 올라갈 때 우레와 같은 소리를 울리기 때문에 명사산이라고 했다는 말도 한다.

이 명사산의 동쪽에 단애가 형성 되고 거기에 막고굴이 있는데 지금은 백 양나무들을 앞에 두고 남쪽굴과 북쪽굴로 나누어져 있다. 북쪽굴은 최근 개발된 곳이고 현재 관광객에게 개방되는 곳은 남 쪽 동굴의 일부분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석실보장’ 이라고 쓰인 현판이 큰 일주문에 걸려 있 고 그곳을 지나면 다시 ‘막고굴’이라고쓴 일주문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면 정면에서 약간 비껴나 9층으로 된 누각이 보이고 그 좌우로 길게 석굴이 늘어서 있다. 

이 9층 누각을 북대불이라 하는데 이 안에는 당나라의 측천무후 시대에 만들어 진 33미터 높이의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남쪽에도 이와 비슷한 누각이 있는데 그것은 남대불로 부르고 여기에도 26미터 높이의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석실에는 모두 일련번호가 붙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최초에 프랑스인 페리오가 붙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중국의 유명한 화가인 장대천이 돈황예술연구소 직원으로 있으면서 다시 번호를 매겼는데 연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들의 이름을 따서 P와 C로 함께 번호를 적어 놓았다.

옛날에는 나무로 난간을 만들어 석실을 드나들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전부 시멘트로 발라져 있고 전면의 벽도 모두 시멘트 로 범벅이 되어 있어 옛 모습 그대로는 거의 볼 수 없다.

더구나 문물 보호를 위해 석실 앞에는 전부 문을 달아 자물쇠로 채어놓고 있었다.

관광객들에게는 겨우 10여 군데만 한정해서 보여주는데 그나마 보여주는 데만 계속 보여주기 때문에 다른 곳을 둘러보 려면 특별허가를 받아야 하며 490여개나되는 석실을 제대로 다 보려면 몇 년은 걸려야 할 것 같았다.

이 곳의 벽화는 크게 나누어 부처님과 보살, 호법신장을 그린 것이 많고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 석가모니 부 처님의 본생담 등 불교 관련 고사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 충국의 신화를 소재로 그린 것, 석굴을 만드는데 경제적 후원을 했던 사람이나 그들의 가족을 그린 것, 장식이나 도안 등을 그린 것, 산수화 등 으로 나눌 수 있다.

워낙 긴 시간에 걸쳐서 조성된 벽화들 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벽화의 특성을 말 하기는 어렵지만 힘있는 선과 역동적인 묘사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우 보살의 상들은 거의가 다 진흙으로 만들어 채색을 입힌 것인데 이것을 전문 적으로는 소조채색상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목불이나 동불에 비해 훼손이 심하지만 남아 있는 것들은 대체 로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묘사가 섬세했 다. 나머지 소상은 거의가 다 청대에 와 서 개보수를 한 것으로서 예술적 감각이 없는 비전문가가 했는지 상호도 이상하고 채색도 희끄무레하게 되어 있어 전혀 돈황 냄새가 나지 않고 초등학생이 흙장난 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가운데에서 328굴의 부처님은 상호와 자태가 너무 장 엄하여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석실은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다양한데 그 느낌은 직접 보지 않고는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어렵다.

1902년 무렵에 소련의 공산 적군에 쫓 겨 망명해 온 백계 러시아인들을 위해 양증신이라는 관리가 그들에게 이 동굴을 피신처로 제공했는데 그 때에 동굴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백계 러시아인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면 서 솥을 걸고 밥도 해 먹고 해서 그을음이 생겨 벽화를 다 망쳐 놓았다는 것이 다.

현재 중국 정부에서는 벽화 복원을 위 해 많은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때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화재 보호만 잘해도 자손 대대로 먹 고 사는데 나라가 후진이고 미개하면 이런 경우를 많이 겪는다. 얼마 전에 파괴 된 아프가니스탄의 마미%불도 무참하게 파괴되었지만 만약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전세계의 수많은 불자들이 두고두고 방문해서 외화획득에 도움을 줄 수 있을 텐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현상은 계속된다. 우리 옛절은 산세와 어울려 절묘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수행도량으로서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좋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원경제가 풍족해지면서 그러한 좋은 자연 배경을 허물고 부조화스러운 대형공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 깝다.

막고굴의 석실은 크고 작은 것이 두루 섞여서 각자의 개성을 자랑하고 있다.

내가 본 석실 중에서 285굴은 천정까지 벽화가 가득 차 있는데 마치 하늘나라에 온 느낌이 들었다. 그 이외에도 112굴의 반탄비파상이라던가 159굴의 천녀상, 57굴의 보살상 등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 밖에도 비천상의 원형이나 천녀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석실이 많았다.

잠시 시공을 잊고 돈황 벽화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취해 있다가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서야 했다. 나머지 못 본 부분은 책을 통해서 볼 수밖에.

막고굴을 나오다 보면 진입로에 뢰음사라는 절이 있길래 들어가 봤는데 거기에서 중국불교의 또 다른 면을 발견 했다.

이상한 제복을 입은 청연남녀들이 관광객을 붙들고 향을 사라고 권유하면서 향 을 사지 않으면 대웅전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데 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절은 제승이라는 노스님이 발원해서 몇몇 유지들과 함께 1999년에 절을 세웠는데 20이년 어느 날 밤에 깡패들이 몰려와서 이 절을 접수해 버리고 스님들은 내쫓아 버렸다고 했다.

스님들은 지방 관청에 탄원도 해보고 그 지방 종교국에 알리기도 했지만 탐관 오리들이 한 통속이 되어서 감싸고 돌면서 절의 수입은 나누어 먹기를 하기 때문에 요지부동이라는 것이었다.

불교협회는 아직 이런 곳에 힘이 미치지 못하고 그 노스님은 원통한 마음만 억누른 채 각계에 하소연을 하는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루 빨리 중국불교계가 힘을 얻어 이런 탐관오리와 깡패 집단들을 몰아내고 모든 사찰이 스님들에 의해 운영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관광객들도 이러한 사정을 잘 이해하고 스님이 없이 운영되는 이런 뇌음 사와 같은 절에는 보시를 삼가해 주었으면 한다. 아마 중국불교협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이러한 사원들이 중국 전역에 많이 있을 것이다.

하루 빨리 중국 불교계가 발전하고 중국불교협회가 힘을 얻어 제대로 된 불교 가 중국에 뿌리내리기를 염원하면서 감숙성 일대의 불교유적 답사를 마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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