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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권위, 사회적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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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69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5-07-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총지칼럼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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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종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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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23 09:37 조회 1,9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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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권위, 사회적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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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총지종 법장원 연구원

현 고려대학교 BK21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불교 연구로 철학 석사

스토니부룩대학교 불교 연구로 철학 박사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현대사회 일반에 적용되는 원칙이다. 중동의 일부 국가에서는 여전히 신권정치를 추구하고 있지만 이는 기독교 중심의 서방 문명과 오랜 갈등을 겪고 있는 아랍사회의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과학적 사고와 세속적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사회 전반에 걸친 절대적인 권위와 실질적인 통제력을 가질 수는 없다. 또 다양한 종교가 뒤섞여 있는 현대 사회에서 특정종교가 국가 권력과 연결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심 각한 종교분쟁과 그에 따른 사회적 분열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종교의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무관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대사회에서도 종교는 여전히 교도들의 신앙생활 이상의 영역에 일정정도 관여하게 되는데, 그것은 종교 자체의 본질적 성질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요구이기도 하다.

종교는 개인적 행위일 뿐 아니라 사회적 행위이다. 이 점은 개인의 깨달음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불교 역시 교리의 세부적 인 내용에 상관없이 사회에 커다한 영향 력을 행사해 왰을 뿐 아니라 또 사회로 부터 영향을 받아왔다는 것은 불교의 실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지금도 남방 불교권 국가들에서는 불교가 국교의 역 할을 하고 있다. 또, 북방 불교 전통에 있는 국가들 가운데서도 티벳은 불교의 수장이 국가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역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그 리고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의 역할 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불교는 어떤 역할을 얼마나 해야 하는가? 한국 불교의 최고 지도자가 달라이라마처럼 될 수는 없으며, 한국 불교가 미얀마나, 태국, 혹은 스리랑카 불교의 사회적 지위를 차지할 수는 없다. 한국사회에서는 정치와 종교는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또 한국사회는 다종교 사회이며 카 톨릭과 개신교를 합친 기독교 신자 수가 불교신자 수를 넘어서고 있다.

이처럼 불교가 한국 사회에 절대적인 힘을 미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 이지만, 자기 목소리를 낼 필요는 있으며 그것은 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불교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신도수를 가진 종교이다. 불교 신도수는 기독교와 카톨릭 신도수를 합친 수와 맞 먹는다. 뿐만 아니라 불교 신도수는 지 속적인 증가세에 있다. 불교가 꼭 신도 수의 산술적 비율만큼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한국 불교는 신도 수에 비해서 너무나 영향력이 약하다.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약한가는 20여 년 전 일이긴 하지만 80년 10.27 법난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는 사회정화 명목으로 조계종 산하 거의 모든 사찰에 들이닥쳐 무수한 승려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하여 폭행하고, 고문하였다. 당시 조 계종이 각종 비리로 얼룩진 것은 사실이 지만, 군부에서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 은 조계종의 비리를 청산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군부는 마음만 먹으면 종교계도 손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 이었다. 70년대 유신시절에 종교계는 학생 운동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반정부 세력이었으므로 신군부는 자신들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종교계를 통제할 생 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통제 의 방법으로는 물리적 폭력에 의한 공포심 조장을 택하였다. 이 방법은 또한 군부가 학생운동권을 제압하는 방식이기도 한데, 실제로 군부는 당시 대학에도 난 입하여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며 학생 운동 지도부를 연행해 가서 학생들의 분 노를 샀다. 그런데 당시 불교계가 이러 한 법난을 당한 것은 분노스런 일이 아 니라 서글픈 일이었다. 왜냐 하면 불교 계는 반정부 투쟁을 벌였기 때문이 아니 라 사회적으로 바보 취급을 받아 법난을 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정부 투쟁을 벌인 것은 기독교였으며 불교는 늘 어용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런데도 군부가 불교계를 탄압한 것은 기가 센 기독교를 탄압했을 때 불러 올 반

발의 부작용 없이 종교계를 통제하기 위 해서였다. 실제로 군부의 이러한 전략은 적중하였다. 불교계는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제대로 반발한번 하지 못 했다. 군부가 물러나고 세 번째 민간 정부가 들어 선 지금까지도 불교계에서는 스스로 그에 대한 진상조사 한번 제대로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불교계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정치적 잠재력을 가진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의 카톨릭의 정치적 영향력에 비하면 이점이 아주 잘 드러난다. 카톨릭 교도는 전체 종교 인구의 약 6%에 불과하지만 그 영향력은 전체 종교 인구의 26%를 차지하고 있는 불교의 수십 배에 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한국 카톨릭의 수장인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정신적 귄위를 가진 인물이다. 명동성당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집단들의 집회와 농성 장소로 이용되어 민주화의 성지라 고 불리었지만, 한 번도 이들을 해산시 키기 위해 경찰이 들어간 적이 없다. 집회와 농성을 하는 사람들은 신부나 수녀 도 아닐 뿐 아니 카톨릭 교도도 아니 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그들을 손댈 수 없었다. 아무런 구체적인 이유도 없 이 사찰에 뛰어들어 승려들을 폭행하고 끌고 가서 고문한 것과는 얼마나 다른 태도인가? 또 최근에 정진석 주교는 온 국민이 집단적 히스테리 상태에서 떠받드는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 세포 연구 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지적하였지만, 정진석 주교가 이로 인한 역풍을 맡지는 않았다. 정진석 주교의 입장은 부시 대통령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극우”로 보지는 않는다. 보수주의로 보기는 하지만 적어도 “극단적 보수”로 보지는 않는 것이다. 그 까 닭은 사람들이 정진석 주교 개인의 식견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한국 카톨릭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권위 때문이다. 만약 불교계에서 고승대덕이라 일컬어지는 스님 가운데 누가 정진석 주교와 같은 입 장을 피력했다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 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지만 불교계는 이미 2년 전 초파일날 박세리 선수와 함께 황우석 교수에게 자랑스런 불자상을 수상한 바가 있는 터이다.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불교계 지도 자들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지금까지 한국 불교계의 지도자들은 한국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제대로 취한 경우가 드물다. 예전에는 전혀 시대의 방향에 역행 하는 태도를 취해 왔다. 최근에는 낳아 진 측면이 있으나, 대게는 다른 집단들 의 움직임에 들러리 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평양 8.15 통일축전에 참가의 경우도 그렇다. 한국 불교의 최고 대표자도 참가하였는데, 그가 구체적으로 한 역할을 알 수는 없으나TV화면에 비친 그의 모습은 어느 민간인 대표의 들러리 처럼 보였다. 그에게는 한 번도TV 마이크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방북단 속 에서 실질적으로 무엇을 하였건 간에 민간인 대표의 들러리처럼 보인 것은 안타 까운 일이다. 정말로 아무런 실질적인 역할도 맞지 않은 상태에서 없이 불교계 의 최고 대표자가 자리 채우기 위해 참가하였다면 참으로 망신스런 일이며,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IV 인 터뷰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이 사 회가 불교를 깔보고 있는 것이다.

불교계를 대표해서 사회적 활동을 하는 불교 지도자들은 자신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사회적 집단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에 맞는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결코 권위주의적 행동이 아니다. 그 권위는 결코 대표자 개인의 권위가 아니라 불교인 전체의 권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할 때는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 국가의 대통령이 외국에 가서 대통령 수행비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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