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의 문화적 환경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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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70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5-08-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총지칼럼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종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24 06:59 조회 1,798회본문
현 총지종 법장원 연구원
현 고려대학교 BK21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불교 연구로 철학 석사
스토니부룩대학교 불교 연구로 철학 박사
한국 사회가 80년대 이후 급속히 물 질지상주의 내지는 세속주의로 치달려 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종교 인구의 증가는 의아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왜 종교를 믿는가?” 라는 물음에 응답 자의 67.9%가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라고 대답했으며, “죽은 다음 영원한 삶을 위해”라고 답한 사람은 7.8%에 불 과하다는 것을 보면, 이러한 종교 인구 의 증가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된다.
대부분의 종교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도그마일 뿐이다. 현실 속에서는 종교적 진리 역시 하나의 상대적 진리일 뿐 아 니라, 심지어는 진리 여부를 판단할 필 요가 없는 문화 현상이다. 그리고 이 문화 현상은 언제나 사회의 여타 문화적 환경과 더불어 변모할 수밖에 없다.
종교문화는 여타의 문화적 현상들에 비해 훨씬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역시 다른 문화 현상들 과 지속적인 괴리를 일으키면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럴 경우 그 종교는 사회로 부터 고립되고, 결국에는 그 종교 자체 가 다른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면서 전파하고자 한 원래 가치의 확산이 불가 능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존립 조차 유지할 수 없는 무력한 처지에 놓 이게 되고 만다.
“전생,” “천국,” “지옥,” “영생,” “하나님,” “연화장 세계” 같은 종교적 개념들은 과학과 학문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실제로 존재하는 진리로 받아들여 지기 어렵다. 이러한 개념들은 이제 진 리의 세계에 있는 종교적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신화와 설화적 세계에 있는 문학적 의미의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7.8%는 여전히 “전생,” “천국,” “지옥,” “영생,” “하나님,” “연화장 세계” 등이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지만, 나머지 절대다수는 이러한 개념들은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서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더욱이 불교 신자의 경우는 단 1.8%의 사람들만이 이러한 세계를 실재 하는 것을 전제로 한 신행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영원 절대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서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 효과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어떤 정신적 경지에 도달하기 위 해서 종교를 믿는다. 사람들의 종교관이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은 사회 문화의 전 반적인 세속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1990년대를 경과하면서 한국인들은 들은 매우 이해 타산적으로 되었다. 이러 한 태도는 정신적 가치와 결부된 행위들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정신적 가치와 결부된 행위들에 대해서는 그 러한 행위의 과학적 타당성을 요구하지 도 않았으며, 현실적 결과물에 대한 집착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한국인들은 정신 적인 가치와 결부된 행위들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가치들과 결부된 행위들에 대 한 판단 기준과 동일한 판단 기준을 들 이대고 있다. 한국인들의 종교관의 변화 는 사회 전반의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영혼과 결부된 종교적 도그마에 본인 스스로 사로잡혀 있거나, 이러한 도그마 에 의지해서 신도들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상당수 종교인들에게는 한국인들의 이러한 종교관의 변화가 매우 당혹스러 울 것이다.그러나 신행심의 약화처럼 보이는 이러한 종교관의 변화는 매우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의식이 매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고방식은 불교의 원래 가르침과도 잘 상통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열반의 세계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의 평화 이상의 경지이지만, 그 분 역시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믿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절에 오는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심이 깊은 사람들”은 아니다. 이들은 무엇을 간절히 구하지도 않을 것이요, 승직자들을 숭앙하며 그 도력에 의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백일기도, 천일기도에 열중하 지도 않을 것이며, 많은 희사금을 내지 도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서 산 중의 사찰은 조용한 휴양지와 다를 것이 없으며, 시내의 법당은 셀프 서비스로 운영되는 조용한 까페와 다를 것이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석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스스로 보고 확인한 것을 토대로 자신의 신행생활을 해 나가려 하고 있다.
한국 불교는 사람들의 변화된 종교관 에 맞는 전도를 해야 한다. 간절한 기복 적 염원에서부터 출발하는 사람들이 아 니라, 일상생활 속에서의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해야 한다.
이들 양자는 서로 성격이 매우 다른 사람들이다. 전자의 경우는 깊은 신심은 있으나 지혜가 부족하고 어두운 사람들 인 반면에, 후자는 지혜롭기는 하나 믿음이 깊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서 불교계의 지도자들이 혼돈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역설이 있다. 단순한 논리로 말하면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주고, 신심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신심을 부여해 주면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 불교의 지도자 들이 해야 할 것은 불교 신도들이 신심의 깊이를 더할 것을 강조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다. 한국의 불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굳건한 믿음 이전에 지혜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이 약한 신도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한 진리의 세계가 있는 것을 알고 믿음의 깊이를 더해 갈 할 것이다.
믿음을 앞세우다 보면 지혜가 발달한 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말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으로 다가가고, 지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혜로 다가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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