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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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70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5-08-01 신문면수 1면 카테고리 총지캠페인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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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23 19:49 조회 1,836회본문
1910년 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되고 그해 12월 혹한의 추위 속에서 60여명의 대가 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여섯 아들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형제들이었다. 그중 넷째인 우당 이회영(1867〜1932)이 형제의 동의를 얻어 내린 결단으로 집안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이회영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사이항복의 11세 후손이다. 이회영의 집안 은 이항복부터 10대동안 계속해서 재상을 배출 한 명문가로서 10명 중 6명은 영의정을 지냈고 1명은 좌의정을 지냈다. 당시 명문가로 추앙받던 많은 지배계급층들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 합방하는데 협조했고 그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는데 그 수가 무려 76명이나 되었고 일본에서 받은 돈도 오늘날 화폐 수백억원에 달했다. 나라와 운명을 같이해야 할 많은 지도계급 층들이 나라를 팔아넘긴 댓가로 호의호식할 때 이희영은 조선에서 10대를 재상의 벼슬한 가문으로서 풍전등화의 국운을 살리고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최소한의 도덕적 의 무라고 판단하여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40만원,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00억원 이상 되는 큰돈을 가지고 중국으로 가서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10년 동안이나 3500 여명의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를 키웠다.
44세에 만주로 건너가 66세에 생을 마감할 때 까지 그들은 끼니를 먹는 날 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하니 본인이나 가족의 고생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냥 우리 나라에 머물렀으면 자손대대로 부귀를 누릴 만큼 많은 재산과 삼한갑족으로서의 명예와 존경을 받고 살았을 그가 자신은 물론 이며 가족까지 희생을 감수하면서 만주로 떠난 것은 아마도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 하기 위한 최고의 명문가만이 가질 수 있는자 긍심과 책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회 지도층 계급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제,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그 사회의 지도층이었던 이회영 형제들이 내렸던 결정은 오늘날 현대사회의 지 도계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귀감이 되어 더 이상 방송이나 신문에 사회지도층의 부 정부패와 관련된 뉴스는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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