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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 불교의 대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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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68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5-06-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총지칼럼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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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종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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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23 07:25 조회 1,40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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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 불교의 대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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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총지종 법장원 연구원

현 고려대학교 BK21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불교 연구로 철학 석사

스토니부룩대학교 불교 연구로 철학 박사


한국불교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 가운 데 하나가 기복성에 대한 것이다. 불교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거나 인식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불교가 가지고 있는 기복성을 비판한다. 불교학자를 포함한 지식층 일반은 물론이고, 일부 승려 들과 신도들까지도 이러한 비판에 가세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비판적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기복성은 당분간 없어질 것 같지가 않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불교의 기복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불교의 기복성이 결 코 철학적 원칙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 이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불교의 기복성을 문제 삼지만 기복성은 결코 한국불교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 종교 일반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전세계에 광범위한 신도들이 있는 모든 종교에 서 기복성을 볼 수 있다. 불교문화권 내 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티벧 불교, 동남아 시아 불교, 일본 불교, 대만 불교 등 모든 불교 문화권에서 기복성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기복성이 특별히 이들 여타 종교나 여타 불교 문화 권에서의 기복성에 비해 더한 것도 없다. 이들 불교 문화권에서의 기복성 역시 한국 불교 이상으로 강하다. 기복성은 거의 모든 시대의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으로서 종교의 역사와 함 께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기복성은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적 심성에 뿌리박고 있다.

또한 불경 내에서도 기복 행위를 정당 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을 여러 곳에 서 발견할 수 있다. 후대의 대승 경전에서 뿐 아니라, 초기의 불교 문헌들 속에 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기복성이이 처럼 인간의 종교적 심성과 연관되어 있 고 또 불경 속에서 이를 정당화하는 것처 럼 보이는 구절이 있다고 해서 한국 불교 의 기복성을 옹호하거나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복성은 분명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의 참뜻이 아닐 뿐 아니라, 방치해 두는 것은 참뜻에 어긋나 는 일이다. 불교인들은 분명 기복성을 극 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복성을 단지 부정만 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극 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 리고 말이나 구호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한국불교의 기복성을 극복하기 위 해서는 현실종교와 기복성과의 이러한 보편적인 연관성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이해 할 때만이 합리적인 처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복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문제에 대해 점진적인 접근을 시도할 필 요가 있다. 당장에 모든 기복 행위를 근 절하려고 하면 승려들과 신도들 모두에 게 불안감만 불러일으킬 것이다. 신도들 은 삶의 불안을 해소할 길이 없게 되고, 승려들은 복빌러 오는 신도들이 모두 떠 나고 나면 절이 텅 비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그런 불행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사실 기복성이 하루아침에 근절될 수 있는 것이라면 기복성이 모든 종교의 전 역사에 걸쳐서 그렇게 지속되지도 않았 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기복성을 극복 한 종교 생활을 한다는 것은 깨달음의 한 단계를 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 가 기복성을 극복하였다면 그는 작게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크게는 생에 대한 집착조차 끊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 믿음이 없는 사람의 경우 기복적 신앙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과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극복한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는 현실적인'방법을 통해 서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실현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믿음 을 가지면서도 기복성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내적인 전환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단계에 접어든 사람은 더 이상 일반 신도의 차원을 넘어서 수행의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도 스승은 필요할 수 있겠지만, 승려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듯 기복성을 극복한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잘못된 종교 생활을 바로잡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기복성이 없는 종교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심대한 의미를 내포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신도들이 기복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통해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속적 복락이 아니라, 그러한 세속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끊는 방법이라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그러한 가르침 에 공감하고 몸소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승려들은 일차적으로는 기복적 의례 행위를 점차 줄여서 신도들 이 세속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키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대신에 설법과 교 육을 통하여 불교의 원래 가르침이 무엇 인가를 지속적으로 일깨워야 한다. 절은 기복적 의례의 공간이 아니라 진리를 가 르치는 교육 공간으로 변화되어야 하며, 승려들은 제의를 집행하는 사제가 아니라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변신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와 변신은 점차적 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세속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깨우치는 것은 결코 논리적인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착은 우리의 논리적인 판단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타고난 인간의 본능에서 생기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욕망을 버 려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 하더라도, 육신은 계속해서 욕망을 만들어 내고 욕망은 다사 집착을 낳는다. 욕망을 버리고 집착을 끊는 길은 깨우침 이후에 지속적인 수련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승려들은 무엇이 올바른 진리인가에 대한 교육과 아울러 교육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수련 프로그램을 제공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기복 불교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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