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성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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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68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5-06-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아함경 이야기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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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23 08:25 조회 2,073회본문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면 육처가 멸하고, 육처가 멸하면 촉이 멸하고, 촉이 멸하면 수가 멸하고, 수가 멸하면 애가 멸 하고, 애가 멸하면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늙 음, 죽음, 근심, 슬픔, 괴로움, 번뇌가 멸한다. 그리하여 모든 괴로움은 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명으로 인해서 모든 괴로움이 일어나 기 때문에 무명을 없앤다면'모든 괴로움도 없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아직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진리에 의하여 눈을 떴고 지 가 생겼고 혜가 생겨 깨달음을 얻고 광명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이고 무명을 제거하면 모든 괴로움은 사라진다. 이것이 부처님이 발견하신 진리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단순한 진 가 아닙니까? 십이연기의 앞과 끝만 보자면 무명에 의해서 생노병사 등의 괴로움이 생기니 무명을 제거하면 생노병사의 괴로움도 자연히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쾌하고 간단한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께서는 당신이 깨달으신 진리를 이렇게 정리하고 스스로 감흥에 겨워 이런 게송을 읊으셨다고 합니다.
“고요히 사유하는 성자에게 진리는 드러났다. 그 순간 모든 의혹은 사라져 버렸다. 연기의 도리를 알았으므로.”
이 짧은 게송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생노병사의 괴로움의 근원을 밝히기 위하여 불철주야 정진하시던 사문 고타마 싯 다르타에게 드디어 진리는 그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그 진리는 곧 연기의 법칙으로서 그것에 의하여 괴로움의 원인과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사문 고타마 싯 다르타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거듭 태어나셨던 것 입니다. 므리고 그것이 곧 불교의 시작을 알리는 위대한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밤이 깊어졌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십이연기의 공식을 발생하는 순서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순서대로 사유하셨다고 합니다. 즉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 있으며, 행으로 말미암아 식이 있으며 하는 식으로 끝에 가서는 생이 있고 이로 인해서 노사와 온갖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을 사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십이연기의 순관 혹은 유전 연기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며 하는식 으로 생이 멸하면 노사와 온갖 괴로움이 멸한다는 것을 사유하셨습니다. 이것을 십이연기의 역관 혹 은 환멸연기라고 합니다. 십이연기의 이러한 순관 과 역관을 부처님께서는 새벽녘에 다시 한번 더 사 유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고의 발생원인과 그것을 소멸하는 이치를 완전히 파악하시고 감흥에 겨워서 이렇게 게송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고요히 사유하는 성자에게 진리는 드러났다. 태양이 허공에서 내리비추듯 악마의 군대를 마침내 쳐부수었다.”
더할 나위 없는 위없는 바른 지혜에 의해서 누구도 깨닫지 못한 진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번뇌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이 순간에 생노 병사의 온갖 괴로움을 벗어버리고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해탈을 이루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그 자리에서 또 상당 기간 깨달은 내용을 음 미하면서 앉아 계셨던 모양입니다. 경전에서는 그 이후에도 그 근처에서 이리 저리 옮겨 앉아서 해탈 의 즐거움을 누리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 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 좌선하며 사유하신 기간은 경전에 따라 다른데 어떤 것은 3주, 길게는 7주간 까지 앉아 계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아무튼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반복하며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7일을 더 보낸 부처님께서는 삼매 에서 깨어나 일종의 무화과나무인 아자팔라 니그로 다 나무 아래로 가셔서 다시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다고 합니다. 아자팔라 니그로다 나무는 염소 떼들에게 그늘을 주는 나무라는 뜻이 있는 것으로 봐서 잎이 많고 그늘이 드리워진 그런 나무였을 것입니다.
(마하박가)라는 율장에 보면 이 때에 처음으로 한 교만한 바라문이 다가와서 어떻게 해야 바라문 이 되는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 때의 바라문이라 는 것은 참된 수행자라는 뜻입니다. 계급으로서의 바라문이 아니라 진정한 수행자를 나타내는 뜻으로 바라문이라고 부른 예는 경전에 자주 나옵니다.
아마 그 바라문 계급의 사람은 자기가 바라문이라는 것을 은근히 내세우면서 당신 같은 사람이 바 라문이 뭔지나 아느냐 하는 투로 물었는지도 모릅 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바라문이라는 것은 교만하지 않으며 죄악을 멀리하고 마음이 청정하며 자제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참된 수행자 로서의 바라문은 이래야 된다고 젊잖게 타이르셨던 모양입니다. 경전에서는 이렇게만 묘사해 놓고 더 이상 자세한 얘기는 없는데 아마 부처님께서 삼매 에 잠겨 계실 때 어떤 교만한 바라문이 지나가면서 저 사람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인지 한번 알아보자 싶어 툭 던진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부처님께서 너무나 평범한 대답을 하시자 이 바라문은 흥미를 잃고 그냥 지나쳐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부 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 다른 사람과 얘기한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참된 수행자는 교만하지 않아야 하 며 마음이 청정해야 하고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간단한 이 말씀 속에는 수행자로서의 기본적인 자세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 습니다. 수행자는 첫째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수행자를 자처하는 많은.사람들이 너무 거만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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