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안에서 가치와 이념 추구의 해답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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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5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10-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종조원정 대성사 일대기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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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10-11 15:50 조회 1,651회본문
종교 안에서 가치와 이념 추구의 해답을 찾다
중·일 불교, 승단 중심에서 재가자 수행과 실천 주장
시대의 요구 주시, 경전과 문헌을 구해 탐구하기 시작
주하현은 일본 패망 후 중국 항일영웅 조상지(趙尙志, 자오상즈)를 기려 상즈시(尙志市)로 이름을 바꿨다. 하얼빈시 행정구역에 속한 곳이다. 우리로 치면 서울과 붙어 있는 과천과 같은 셈이다. 주하현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스키장이 있는 곳으로 겨울이면 휴양과 여가를 즐기는 명소이다. 게다가 위치가 하얼빈시와 목단강시(木丹江市) 사이에 있어서 교통과 교역의 길목이다. 한마디로 정미소를 경영하기에는 더할 바 없이 적합한 곳이다.
정미소 문을 열자 대성사의 빠른 일처리와 공정한 업무처리는 일대의 상인들과 동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41년 10월 대성사는 주하현 정미소 업자들의 조합인 도정조합의 이사장으로 뽑혔다. 그 다음해에는 주하현 미곡배급조합의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부터 일제는 공출제도를 만들어 생산된 양곡을 모두 빼앗고 식량으로 잡곡과 대두박 등 사료를 대신 지급하기 시작했다. 만주 일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쌀은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식량배급제는 일본인들은 쌀로 배급하고, 조선인에게는 쌀 35퍼센트에 좁쌀 65퍼센트를 섞어서 배급했다.
이 문제는 조선인들에게 큰 저항을 일으켰다. 말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에 대한 차별이 식량과 징용 등에서 크게 드러나고 있었다. 반일의 기미가 커지자 일제는 만주의 수도인 신경과 하얼빈 등 대도시 지역 조선인들에게도 식량 전부를 쌀로 지급하기로 했다. 자칫 폭동이라도 일으킬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유화적인 태도는 점점 중요해진 징용과 징병 거부를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정황 때문에 도정조합과 배급조합에 주목과 감시의 눈길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쌀값이 오를 대로 오르고 있고, 배급에 대한 불만은 커져 갔으므로 공명정대하게 일처리를 하지 않으면 세상 모두로부터 원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성사의 성품은 이런 불만과 의심을 충분히 잠재워 주하현에서 쌀 배급과 관련된 항의는 없었다.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사익보다는 대의를 따르는 것이 대성사 가문의 가풍이었다. 그런 가풍대로 공과 사를 철저히 지켜 정미소 경영과 조합 업무를 처리해 갔다.
사업은 잘 되어 입고 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세상 사람과도 원만하게 지냈으며 나름 존경도 받고 있었다. 세상은 다시 한 번 커다란 폭풍을 앞두고 있었지만, 대성사 가족은 잠깐이나마 풍족하고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부터 대성사는 종교, 특히 불교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된다. 당시 중국과 일본 불교계는 큰 변화를 맞고 있었다. 청이 망하고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되자 중국 지식인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상황 속에서 어떤 가치와 이념을 추구해야 할지 시대적인 고민을 한 것이다. 과거의 유교 사상은 더는 빛이 되지 못했고, 물질 중심의 서구사상과 철학은 아직 설익어 보였다. 이 때문에 불교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양문회(楊文會) 등이 열어간 불교의 새로운 길은 대성사를 사로잡았다.
그들은 산중불교에서 벗어나 거사 중심의 생활불교를 주창했다.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경전을 출판했으며, 불교를 알아들을 수 있는 현실적인 언어로 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추세는 하얼빈의 대성사도 깊이 주목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어로 출간되기 시작한 새로운 흐름의 불교 서적과 불경을 구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시대는 새로운 이념과 사상, 옛것과는 다른 길을 요구했다.
일본도 불교가 새로운 사조의 물꼬를 터뜨렸다. 특히 1930년 교육자들이 모여 만든 법화종 계통의 창가교육학회(創價敎育學會)는 불교계가 침략전쟁과 식민지 정책을 지지하는 점을 반대하여 법화경 중심의 새로운 재가불교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 모두 승단 중심의 불교계에 비추어 재가자들의 수행과 실천을 주장했다. 대성사는 이런 시대의 요구를 주시하면서, 그들이 펴낸 책과 경전을 모으고 공부하며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읽고 받아들이고 마음에 새긴 경전과 강론이 산을 이루고 지혜는 바다처럼 모여 후일의 기반이 되었다. 그처럼 하얼빈 시절은 밀교의 가르침으로 세상에 길을 전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달도 차면 기울고, 붉은 꽃은 바람 앞에 떨어질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일본제국주의는 가득 차올랐다가 기울어가는 시간을 맞았다. 제국의 영토가 점점 넓어지고 전선이 확장될수록 승리의 기쁨보다 패망의 두려움이 더 짙어갔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급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은 일본이 그리던 방향과는 크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전선은 팽창되고 일본군은 광기에 가까운 만행을 곳곳에서 저질렀다. 중국 난징 대학살과 관동군 731부대의 생체 실험과 학살, 싱가포르의 학살과 베트남의 식량 강탈로 인한 대규모 아사 사태 등 대성사는 단파방송을 통해 이런 소식들을 생생히 듣고 있었다. 당시 만주지역은 각종 정치사상과 이념의 용광로였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주의가 널리 퍼져 조선인 사이에도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급격히 늘었다. 반공노선은 만주국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 무정부주의자뿐 아니라 공화주의자, 왕정복고주의자들까지. 유물론과 유심론, 서구의 철학과 과학, 사상이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대성사는 그런 이념과 사상의 세례를 냉철히 경험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종교는 대성사가 깊이 관심을 기울인 대상이었다. 종교의 심성에는 세상의 고통을 구원하고 살아서 혹은 사후에라도 낙원을 이루려는 이념이 깔려 있다. 전쟁의 참화와 일제의 악행을 지켜보면서 세상의 모순과 불합리를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종교 속에서 찾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 시기 대성사는 각종 종교 관련 경전과 문헌을 구해 탐구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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