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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을 가슴속에 두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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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70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5-08-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이달의 설법문안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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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24 07:02 조회 1,26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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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을 가슴속에 두지 말라

세상의 온갖 풍파를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중생의 삶이란 늘 화창한 날들 같이 밝고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맑은 날들보다 바람 불고 춥고 비오고 눈 내리고 흐린 날들이 더 많듯이 우리네 삶에도 짜증나고 우울하고 슬프고 화낼 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사바세계 중생들의 일상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 일들 가운데 가장 참기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할 때라고 할 것입니다. 특히 변명할 여지도 없이, 그 억울함을 호소할 때도 없이 오해를 받고 온갖 함정에 빠져 아무리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증명해도, 그 덫에서 빠져 나오기는 커녕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한 사람이라 면 참고 견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잘못했다고 생트집을 잡거나,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였는데 혼자만 잘못을 뒤집어 쓸 때나, 믿고 주고 받았는데 주고 받은 사실이 없다고 하거나, 상관이 ‘책임을 진다’고 하여 내키지 않은 일을 마지못해 하였는 데 혼자서 문책을 당할 때 등등 이렇듯 큰 억울함, 작은 억울함, 자신의 삶에 대 한 억울함, 남으로부터 받게 된 억울함을 가질 것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느껴지면 그 즉시 속이 답답해지고 원통함을 견디지 못하고 가슴을 치거나 땅을 치면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억울함이 해소가 되고 이해가 되면 억 울함을 가슴에 묻지 않지만, 억울함이 용인되지 않고 풀길이 없으면 홧병을 부르며, 그 원한을 깊이 품고 죽게 되면 원귀가 되거나 환생을 해서라도 복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억울함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요소입니다. 억울함이 사무치면 홧병을 부르고 그 홧병을 풀지 않고 죽으면 원한이 맺혀 풀어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되어 생을 바꾸더라 도 그 원결이 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맺힌 원결이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따라서 우선 우리들이 이 지상에서 사 나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풀어지지 않는 원한은 생을 바꾸어서라도 꼭 풀게 마련 이므로 남에게 원결을 쌓아서 결코 좋은 일이 없는 것 입니다. 그리고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하더라도 원한을 가지고 기어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독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 마음이 있는 한 그 원한의 관계는 결코 풀어지지 않고 세세생생에 원수가 되어 악순 환의 고리가 계속되기 때문에 그 원한의 관계를 푸는 길은 자비로운 용서뿐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억울함이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억울함이 풀리기는 커녕 더욱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억울함을 당하면 가능하다면 빨리 그 자리를 떠나거나 그 생각을 떨져버리는 것이 최상의 방법 입니다. 가능하다면 그 자리를 떠나 여행을 하거나 환경을 바꾸어 주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을 밝히려 하다가 보면 다시 시비가 일고, 그 시비는 분노와 증오와 절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되어, 원망하 는 마음에서 헤어날 길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일초라도 빨리 생각도 몸도 그 자리에서 떠나 버리는 것이 상책임을 명심하십시오.

우리들이 다 알다시피 불교의 원리적 이상은 자비입니다. 자비란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자와 중생의 괴로움을 제거하는 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비정신은 악을 악이라 배격하고 벌하 던가,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바위에 부딪쳐도 끝없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악도 본래 실체가 없어서 선의 결여에 지나지 않음을 아시기 때문이며, 나아가 어떤 악인도 진여에서 나온 여래장을 지니고 있어서 부처님과 평등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동체대비가 불교의 근본사 상인 연기관에 그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아야 겠습니다. 그러므로 자비란 말이 기독교의 종교적 이상인 사랑과 다른 점은 어떤 경우에도 중생을 버리는 일이 없고 따라서 증오가 수반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이 아무리 큰 것이라 해도 이를 끝내 거역하고 배반하였을 때는 죽음이라는 벌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도 심판이라는 조건이 붙은 사랑인 것입니다. 이는 조물주를 전제하는 이상 불가피한 일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주 와 인생의 모든 것을 인과와 연기의 전제로 보며, 인과를 벗어난 우연론이나 전지전능한 창조주에 의한 창조론은 모두 이단으로 봅니다. 어떻게 하다 우연히 생겨난 세계라거나, 또 전지전능한  이 이 우주의 생명체를 창조했다면 이 세계는  순으로 가득 채워지고 약육강식의 대혼란 속에서 암흑과 죄악만이 판을 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설사 잠깐의 실수로 잘못 창조하고 잘못 관리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즉시 다시 개조하고 재창 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역사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 다. 그렇다면 이 세계가 전지전능한 신의 창조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주와 인생의 신비는 오직 불교의 육도윤회를 통해 무시이1래로 인과법, 연기법 으로 풀지 않고서는 해답이 나오 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인과를 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숙명론이나 운명론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닙 니다. 운명론이나 숙명론으로 보면 모든 것은 태어날 때 사주팔자와 함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율적인 의지와 창조적인 노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삶의 흐름을 바꾸어 놓 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인과론과 전혀 다릅니다.

불교의 인과론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나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현재와 같은 삶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받고 있는 이 결과는 어제의 행위가 원인이 된 것이고, 오늘 내가 짓는 행위는 내일의 결과를 낳게 된다 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인과론은 내일을 창조하고 오늘의 과오와 고뇌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기 위한 인과론이기 때문에 숙명적인 운명론 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 야 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상응한 벌을 받아야 하는 세속적, 현실적 법의 태도입니다. 대부분 중생의 생각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로는 세세생생 원수가 되어 윤회의 고뇌를 끊을 방법이 없다는 것입 니다.

결국 나도 남도 함께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보왕삼매론」은 서로가 죽이는 삶이 아니라 연기론적 자비관으로 서로 살리는 삶을 살아가라 는 것입니다. 마치 차가운 얼음과 눈은 훈훈한 봄 바람이 아니면 녹일 수 없듯이, 자비가 아니고서 는 중생의 무명업장을 녹일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정도 차원에 이르면 억울함을 당했을 때 남을- 비방하고 탓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삶 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 인욕바라밀을 수행 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흔히 일상의 삶 가운데에서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고통이 심하단 말인가’하고 탄식하는데 바로 이렇 게 자신에게 그 잘못의 원인을 돌리는 정신입니다. 대부분의 억울함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실컷 잘해 주었더니 돌아오는 것이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처구니가 없어지고 자존심이 깊이 상하게 됩니다. 혹 아직도 이런 생각에서 사로잡혀서 세상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일로 삶을 보내시고 있으시다면 생각을 전환해야 합니다. 과거의 원망과 원통함에 사로 잡혀서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비관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생각 과 마음을 얼마든지 바꾸고 전환 할 수 있는 신기 루와 같은 것입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원한, 원망,억울함 따위는 먼지 털듯이 바람에 훨훨 날려 보내고, 흘러가는 세월의 강물에 던져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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