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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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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72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5-11-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총지칼럼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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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종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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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25 09:37 조회 1,1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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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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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총지종 법장원 연구원

현 고려대학교 BK21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불교 연구로 철학 석사

스토니부룩대학교 불교 연구로 철학 박사



불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매우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인 동시에, 매우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이해하면 불교인이 된다는 것은 정기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가끔 절에 들러서 부처님께 삼배, 혹은 백팔 배를 올린다는 것을 의 미한다. 좀 더 진지한 불교인이 되려면 법회에 참석하여 삼배나 백팔 배를 한 다음 법회에 참석하여 설법을 듣고, 반 야심경이나 천수경을 외우면 된다. 이보 다 더 진지하고 세련된 불교인이 되고 싶으면 요즘 유행하는 불교교양 대학에 등록하여 교리 강좌를 들으면 된다. 혹 아는 스님이 있어 법명을 하나 얻고 화 두를 하나 얻으면 상당히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불교인이 된다.

불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외형적 으로 그리는 것은 이처럼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교인들이 이러한 외형적 활동을 하는 내적인 동기, 즉 불교인이 된다는 것의 실질적인 의미를 말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깨달음이나 열반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인들의 궁극적 목적은 깨달 음을 얻는 것이며, 열반에 드는데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깨 달음과 열반이 “불교인이 된다는 것에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실질적인 답변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깨달음”이나 “열반”이란 말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다시 설명이 필요한데, 그것이 또한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깨달음”이나 “열반,’은 불교의 궁극적 이상이지 대다수 불교인들의 실 천적 과제는 아니라는 데 있다. 그것은 “천당에 가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궁극적 이상일 수는 있어도 그들의 실천적 과제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천당에 가는 것”을 실천적 과제를 삼고 모든 현실의 삶을 버리는 기독교인들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 정신상태가 원만한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깨달음”과 “열반” 을 추구하는 것은 “천당에 가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며, “현실의 삶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천당에 가는 것”은 “현재 의 삶”이 끝이 나야 가능한 일이지만, “깨달음”이나 “열반”을 얻는 것은 “현재의 삶”이 끝이 나는 것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분명 이승에서의 일이며, 열반 또한 논리적으로는 이승에서도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대승불교는 열 반이 이승을 떠나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 하였다.

그렇지만 “깨달음”과 “열반”은 소수의 불교 엘리트들의 종교적 이상일 수는 있어도 절을 찾는 대다수 불교도들의 일상 생활속에서의 염원일 수는 없다. 세속의 온갖 인연의 뒤얽힘으로부터 생겨나 는 수많은 번뇌와 망상과 싸워야 하는 일반 신도들에게 “깨달음”과 “열반”은 당면한 과제일 수가 없다. “깨달음”과 “열반”은 번뇌와 망상과의 완전한 단절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는 또한 현실적으로 온갖 인연과의 단절을 전제 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불교 인들이 불교의 진리를 믿으면서도 세속 에 머물러 있는 것은 바로 끊을 수 없고 놓을 수 없는 인연의 끈 때문이다. 끊을 수 없고 놓을 수 없는 끈은 또한 끊어서도 안 되고 놓아서도 안 되는 그들의 업 보의 결과이다. 무리하게 끊고 놓는다면 그것은 더 큰 업보를 쌓을 뿐이다. 우리는 실제로 출가를 통해 업을 닦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업보를 쌓고 있는 많은 출가자들을 보고 있지 않는가?

오늘날 한국 불교도들이 참된 불교인 이 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나 “열반” 이라는 비현실적인 종교적 이상이 아니라 우선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 실천적 과제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면 실행 가능한 실천적 과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 실천적 과제의 최우선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 규범들을 실천하는 일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와 규범들을 지키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가장 종교적인 사회 가운데 하나이다. 수많은 사찰과 교 회, 불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있다. 한국의 종교단체에서 주장하는 신도수를 다 더하면 한국 인구의 반 이상이 종교인구 이다. 이들 모두가 절이나 교회에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도 불교인 혹은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수를 보아도 이들의 주장이 전혀 허수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는 도덕적 규범들이 무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도덕적 가치들이 조롱당하고 있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종교를 믿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종교적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도덕적 가치 와 규범들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인들은 매우 양극 적인 종교적 목표에 사로잡혀 있다. 지 극히 복과 열반 혹은 천당에서 삶이 그 들의 목표이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도덕은 한국 종교인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의 불교 와 기독교가 그 본래의 가르침에서 완전 히 벗어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불교나 기독교가 결코 도덕적 가치를 가벼이 여기는 종교가 아니다. 열반으로 나아가는 바른 길인 팔정도의 반은 도덕적 규범이며, 모세 십계명의 반 역시 도덕적 규범 들이다. 도덕적 가치의 실천을 도외시하고 불교나 기독교의 종교적 목표를 이루 겠다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자기 모순일 수밖에 없다. 불교인들과 기독교 인들은 도덕적 가치의 실천 토대 위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이상을 추구해야 할 것 이다. 불교인이 된다는 것은 먼저 도덕 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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