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속에서 과학과 종교를 깊이 성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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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6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11-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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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11-02 10:57 조회 1,707회본문
혼돈 속에서 과학과 종교를 깊이 성찰하다
“대성사는 극락사에 들러 관세음보살 전에 향 하나를 피워 올리고, 후일 진리로 세상을 밝힐 발원 하나를 세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주족의 기본적인 신앙은 샤머니즘이다. 무당이 하늘의 뜻을 묻고 전하는 원초적인 정령신앙이 믿음의 근간을 이루고, 이는 우리 민족의 무천신앙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얼빈은 서양과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터라 개신교와 러시아 정교, 가톨릭이 터를 잡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하얼빈에 유대인 거주구역이 있어서 동양에서는 보기 드물게 유대교의 활동도 활발했다.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천리교(天理敎), 금광교(金光敎), 어악교(御嶽敎) 등 교도(神道) 계열 종교가 만주에 들어와 일본인 사이에서 창궐했다. 불교 또한 일본의 군승과 거류민을 따라 흘러들어와 진종(眞宗), 정토종(淨土宗), 일련종(日連宗), 진언종(眞言宗)이 활발하게 포교와 전법을 펼치고 있었다. 비록 제국주의적인 색채를 짙게 띠고 있었지만, 하얼빈에 진출한 일본 종단들을 통해 대성사는 다양한 경전을 접하고 교리와 수행 방법을 공부할 수 있었다.
조선인들 사이에는 단군을 신앙하는 대종교(大倧敎)와 동학계열의 천도교, 시천교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천도교에서 파생한 원종교(元宗敎)는 조선을 벗어나 만주에서 더 크게 교세를 일으키고 있었다.
만주 땅에서 종교는 때때로 어렵고 황량한 시대를 건너는 길잡이가 되기도 했고, 민족의 각성으로 항일의 불씨를 살리는 독립운동의 기반이 될 때도 있었다. 여하튼 종교의 의미와 역할이 더 크게 와 닿는 시절이 열리고 있었다. 시대의 모순을 종교라는 방식으로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하얼빈 일대에서도 활발했다.
반면 공산주의자들의 반종교 움직임도 거세게 일어났다. 유물론을 기반으로 ‘종교는 사회의 해악이며 인민의 정신을 마취하는 아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각종 매체를 이용하여 종교를 미신으로 선전하고 과학의 적으로 돌리는 선동을 펼쳤다. 이런 깊은 혼돈 속에서 대성사는 과학과 종교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나갔다.
대성사는 모친의 영향으로 불심의 심지를 갖고 있었는데, 주하현에서 정미소를 하던 시절에는 자신과 시대를 돌아보며 불교를 더 깊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얼빈에서 가장 큰 사찰은 극락사(極樂寺, 지러쓰)로 천태종 제43대 염허 법사가 1924년에 창건했다. 흑룡강성에서 가장 큰 사찰로 하얼빈 지역과 인근 불자들의 불심의 중심 역할을 해낸 곳이다. 대성사가 근무했던 하얼빈 지방법원과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마도 그 무렵 어떤 때 대성사는 극락사에 들러 관세음보살 전에 향 하나를 피워 올리고, 후일 진리로 세상을 밝힐 발원 하나를 세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주지역은 각 종교가 포교에 전력하던 곳이었다. 기독교와 불교, 민족종교들이 새로운 기반을 닦기 위해 경쟁적으로 포교를 하고 공동체를 조직하고 있었다. 불교는 인적 조직을 만드는 데는 상대적으로 취약했지만, 일본 종단을 중심으로 경전을 보급하는 문서포교가 활발했다. 특히 진종과 진언종은 참회법회와 진언수행을 활발히 펼치고 있었다.
대성사에게 만주 하얼빈과 그 인근에서 보낸 이 시절은 과학과 종교, 사상과 실천을 탐구하고 내적인 세계를 성찰하는 인연을 지은 시기라 할 수 있다. 세상이 난세가 될수록 구세의 인연은 더 깊어지는 법이다.
제국주의의 오만과 무분별한 탐욕은 결국 패망을 향해 치달았다. 하얼빈과 주하현은 소련과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다. 대성사는 단파라디오를 통해 늘 연합군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일본군의 선전과 달리 곳곳에서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파를 통해 전해졌다.
일본과 함께 주축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는 유럽전선에서 연합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일본군은 남방전선과 남태평양에서 미군에 의해 보급로가 차단되고 진격을 중단했다. 곳곳의 전선에서 밀리고, 힘겨운 전황은 승전보보다는 패전의 소식이 더 많이 들려왔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사업은 오히려 호황을 누리게 된다. 식량 특히 쌀은 전시물자로 간주되어 엄격한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식량 배급이 실시됐고, 대성사는 주하현 미곡 배급조합을 책임지는 이사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잠깐 흑심을 품으면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는 자리였지만 늘 공평무사하고 공심을 잃지 않는 자세로 일했기에 배급을 둘러싼 불평은 생기지 않았다. 귀국할 때까지 주하현 미곡조합과 배급조합 이사장 자리를 이견 없이 맡을 수 있었다.
전쟁 상황을 예민하게 지켜보던 대성사는 만주를 떠나야할 시간이 됐음을 알았다. 라디오 전파를 통해 전해오는 소식이 급박했기 때문이다.
‘1944년 독일군은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패배하고 밀리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로마 인근 안치오 해안에 5만 명의 병력을 상륙시켰다. 미국 공군이 독일 베를린 공습을 시작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독일군은 결정적인 패전을 경험했다. 6월이 되자 미군과 일본군이 필리핀 인근에서 해전을 시작했고 일본군의 열세가 계속됐다. 유럽 곳곳이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소식들을 들으면서 대성사는 이 전쟁이 곧 일본군과 주축국의 패전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부부는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조선이 해방될 날이 곧 올 것이오.”
금강관이 되물었다.
“일본이 계속 전쟁에서 이긴다고 합니다.”
“그건 그들의 거짓 선전이오. 곳곳의 전투에서 지고 있고 전쟁은 곧 끝나게 될 것이오. 특히 이 지역에 소련군이 밀려오면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이 일어날 수도 있소.”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이곳 일을 정리하고 밀양으로 돌아갑시다.”
“정미소와 조합일은 어떻게 하시려고……?”
“전세가 기울고 있다는 것을 주변에 조용히 알리고 있습니다. 조합일은 후임자를 찾도록 했소.”
가족의 안전에 비하면 재산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전황이 돌아가는 소식을 대충 전하고 각자 처지에 따라 상황 파악을 잘 하라 당부했다. 정미소 지분은 투자한 인척에게 넘겼다. 그에게도 너무 오래 지체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빨리 정리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1944년 귀국 전 하얼빈에서 동료들과 _맨 오른쪽 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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