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평화로운 시대를 열고 싶은 열망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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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2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7-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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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7-07 14:01 조회 1,980회본문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대를 열고 싶은 열망을 품다
민족의식을 잃지 않는 기개로 대구 교남학교 고등과에 진학
정해진 시간 외 눕지 않고 밥은 늘 일곱 숟가락을 넘지 않아
1924년 대구에 중등교육기관인 교남학교(嶠南學敎)가 문을 열었다. 애국지사 홍주일 등이 대구 남산동에 학교를 연 것이다. 학교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경상도 일원에서 60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렸다. 대부분 일본 학교를 다니지 않은 강골의 학생들이었다. 교풍은 당연히 반일 민족주의의 색채가 짙었다. 당시 대구에 유일한 민족 학교였기에 제대로 된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컸다.
교남학교의 전신은 민족주의 강습을 하던 우헌서루와 그 맥을 이은 교남학원, 후신은 지금의 대구 대륜고등학교이다. 1921년 9월 우헌서루 한 편에서 교남학원으로 문을 열었고, 대구교남학교가 된 것은 1924년 5월 21일의 일이다. ‘교남’은 문경새재 남쪽, 옛 경상도를 일컫는 이름이다. 대성사는 1924년 5월 대구 교남학교 고등과에 진학했다.
당시 대성사의 정신적 태도를 보여주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학생들이 모두 신식 교복을 입을 때 대성사만이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마음속 민족의식을 잃지 않은 기개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남산동 대구 교남학교는 사립일본어학교를 인수하여 문을 열었다. 단층 벽돌 건물을 교사로 쓰고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교육환경이 좋았으며 선생님들에 대한 평판도 좋은 편이었다.
지금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교남학교 고등부의 교육과정은 4년. 교과는 수신과 조선어, 한문, 수학 등이 필수였고 상업과 이과 등을 함께 배울 수 있었다. 고등부를 졸업하면 대학이나 사범학교를 진학할 수 있었다. 당시는 보통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마치는 일이 대부분인 터라 고등부를 졸업한 이들은 고학력의 지식인 대우를 받았다.
당시 대성사의 집안 형편은 고등교육기관으로 진학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졸업과 동시에 하루라도 빨리 세상으로 나아가 일을 해야 할 처지였다.
1927년 대구 교남학교를 졸업한 대성사는 그해 6월 17일 금요일, 음력 5월 18일 정묘년 병오월 임오일에 혼례를 치른다. 대성사의 나이 21세 때의 일이다. 신부는 진주 강씨 집안의 강숙이(姜淑伊), 불명은 금강관(金剛觀)으로 양가는 대성사 가족이 만주에 있을 때부터 집안끼리 혼담이 오고 갔으나 부친의 옥고와 여러 사정으로 성사되지 못하였고 결국 수년이 지난 후에 기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주변에서는 천생연분이라는 덕담이 이어졌다.
혼례는 처가 마당에서 전통예법에 따라 행해졌다. 강숙이의 집은 대성사의 집에서 길을 따라 북쪽 밀양읍 방면으로 걸어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상남면 평촌리. 상남면은 경남에서 손꼽히는 양잠마을로, 금강관은 어려서부터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며 옷을 만드는 일을 배워 가사를 돕고 집안일을 도왔다.
그 시절 여인들의 보통의 삶처럼 어려서는 부모를 따르고, 혼례를 치르면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기르며 집안의 화목과 번성을 이루는 것을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다.
신랑 신부는 그날 처음 얼굴을 보고 절을 함으로써 부부가 되었다. 신부집에서 초례를 치르고 신랑 신부는 말과 가마를 타고 백산리 집으로 돌아왔다. 백산리에서 상례대로 시부모와 시조모를 2년 동안 모시고 시집살이를 한 후 분가하였다.
분가한 다음 해에 아들을 낳았으니 백훈(白薰) 손순표이다. 자식이 태어난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큰일 중 하나이다. 자신을 닮은 아들을 보면서 대성사는 그가 살아야 할 세상을 생각했을 것이다. 보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 그런 시대를 열어주고 싶은 열망을 가슴에 지녔을 것이다.
대성사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책임을 무겁게 느꼈다. 단지 생활과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가정을 꾸려야 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하게 된다. 다행히 금강관의 내조가 있어 세상을 향한 항해는 큰 어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금강관은 평소 남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성품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묵연히 대성사를 소리 없이 지켰는데, 몇 가지 사실에서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대성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특징이 있다. 언제나 입고 먹는 일을 절제하고 정갈히 한 점이다. 끼니는 간단한 찬 몇 가지의 소박한 상차림에 밥은 늘 일곱 숟가락을 넘지 않았다. 넘치게 먹지 않았다. 인간 육신을 지배하는 욕망 중 식욕과 수면욕은 겉으로 그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는 강렬한 징표이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눕지 않았고 때가 되어 끼니를 들 때면 과식하거나 먹을 것을 탐닉하지 않았다. 일체 간식을 찾지 않았을 뿐 아니라 때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
또 한 가지는, 늘 의복을 정갈히 갖춰 입었는데, 이는 금강관의 원력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도 철마다 새로 옷을 지어 누구 앞에 서더라도 당당한 위용을 보이도록 했다. 어린 시절부터 옷을 짓고 안 살림을 살피는 일이 몸과 마음에 배인 덕이다. 의관은 겉으로 드러난 격식이라 내면도 중요하지만 외면 또한 허투루 하지 않았다. 여름이면 덥지 않도록 삼베며 모시옷을 지어 풀을 먹이고 다림질을 하여 대성사가 경전을 옮기거나 원고를 쓸 때 불편하지 않도록 하였다. 겨울이면 솜을 넣은 누비옷을 지어 육신을 따듯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결혼할 당시 양복 한 벌이 소 한 마리 값이 나갔다고 하는데, 교직에 있을 때 늘 철에 맞춘 양복으로 기품을 잃지 않았다. 고급 옷이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나, 언제나 흐트러지지 않는 의복으로 세상에 모습을 보인 데는 금강관의 보이지 않는 내조가 있었다.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일가를 이끌어야 할 시기에 세상은 다시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1931년 일제에 의한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만주 땅엔 괴뢰국 만주국이 세워졌다.
이런 혼란스런 시기에 1936년 5월 대성사는 경남 함양군의 학교비 위원회 서기로 취직하게 된다. 맡은 일은 군 전체의 교육예산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교육 관리비 담당. 오늘의 교육위원회 예산집행관에 해당하는 역할이다. 주로 함양공립농업실수학교(咸陽公立農業實修學敎, 약칭 함양농업학교)의 예산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함양농업학교는 현재 함양중학교의 전신이다. 함양농업학교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모습으로 혁신적인 학교였다. 기와를 올린 한옥 양식의 2층 교사를 갖추고 있었고, 현대식교과 과정을 충실히 갖춘 실력파 학교였다. 대성사는 이곳의 예산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간혹 학생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
함양군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내륙의 오지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걸쳐 있다. 논보다는 밭이 많고 보리가 주요 농작물이었는데 당시 함양농업학교는 경작법을 개량하여 많게는 4배의 수확량을 늘려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교육 서기 생활은 비교적 평탄했고 나름 보람도 있는 일자리였다. 학생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고, 세상의 혼란 속에서 내일의 인재를 키우는 일도 가치 있는 일이었다.
가정은 평화롭고 아들은 잘 자라고 있었지만 세상은 평화롭게 유지되지 않았다. 특히 대륙의 정세는 점점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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