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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불법이고 불법이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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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92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5-11-04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중국불교포럼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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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중앙교육원장 철학박사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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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18 05:42 조회 2,77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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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불법이고 불법이 생활이다
제4회 세계불교포럼 발표 논문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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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회 세계불교포럼에서 중국어로 발표하는 화령정사

사회에 이바지해야 진정한 성불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이다. 그것은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향하여 나아갈 때에 가능하다. 즉 이기 적이고 탐욕적인 자신을 버리고 대중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을 갈고 닦을 때에 가능해 지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수행 을 하여도 공업을 짊어진 이 사회가 안녕하지 못하면 나 또한 행복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당신이 깨달음 을 이루신 후 세간으로돌아와 국왕, 대신으로부터 장자, 천민 에 이르기까지 중생들의 무지를 타파하는 데에 힘을 쏟으셨다.

과거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출가 승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 으나 이제는 모든 경전이 공개되어 있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교 안내서적들이 과거의 수많은 스승들을 대신하고 있 다. 스승과 스승 사이로 이어지던 법의 계승도 이제는 공개된 활자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이는 누구든 지 모든 경전을 마음대로 구해볼 수 있고 거기에 따른 지침서 역시 서점이나도서관에서 손쉽게 구할수 있다.

단지 자기보다 앞선 선지식이 있다면 더욱빠른 진전을볼 수 있을 것이다. 정보화 사회라고 일컬어 지는 지금의 시대야 말로 출가라는 형식을 거치지 않고도 2500년 전의 부처님의 가르침 을 직접 접할수 있는 시대이다. 부처님께서 “누구든지 와서 보 라”고 하신 것처럼 누구든지 스스로 불교의 진수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셈이다.

성불은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추구해 가야 한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있을수 없다. 그러한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은불교의 인과의 법칙에도 어긋나는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부처님의 가 르침은 지금 이 순간 당장 실천되어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담배에 습관이 되어 괴로워하는 사람이 담배를 끊어 버리면 그 순간 담배로부터 해탈되는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에서 벗어나고 도박에 빠진 사람이 도박을 멀리하게 되면 그것이 곧 술에서 해탈되는 것이고 도박 에서 해탈되는것이다.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 을 듣고 질투심을 여의게 되면 그는 질투에서 오는 괴로움에서 해탈된 것이다.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바로 이것이다.우리가 지고한 최상의 성불을 바라기 이전에 일상생활에서 오는 여 러 가지 어리석음 그리고 욕심과 성내는 마음을 제어할 수 있 게 되면 우리는 그만큼 성불에 다가가는 것이 된다. 마음의 제 어에 의하여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맛 볼 수 있으며 그러한 평화가 이웃에게 까지 확산되도록 하는 것 이 곧 불국토의 건설이며 불자들의 사명이다. 대중들과의 소통 을 뒤로 한 체 고답적인 교리만 늘어놓으며 사회의 부조리로부 터 눈을 돌리거나 인간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바로 잡아주지 못한다면 열반이며 해탈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성불이 무슨소 용이 있겠는가?

출가 승단이라는 보호막 속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고고함을 유지하다가 현실사회와 접촉했을 때 소통을 하지 못하고 현 시 대의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상구보리는 이루었 을지 모르지만 하화중생이라는 책무는 다하지 못한 것이 된다. 아울러 신시를 아끼지 않은 재가신자들에게도 큰 빚을 지게 되 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큰길을 갈 때는 보살이지만 버스를 탈 때는 중생이 되어버린다는 말처럼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환경 속에서는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중 들과 함께 하는 순간 도심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 과 같다. 그렇게 된다면 출가생활이 오히려 세속의 더러움 속 에서 연꽃을 피어 올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출 가인도 항상 세속인을 제도하기 위하여 세속과의 소통을 염두 에두어야 한다.

깨달음은출가승만이 도달할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여러 가 지 이유로 출가를 하지 못한 재가불자들에게도 성불의 길은 항 상 열려 있다. 지금 시대의 불교는 출가와 재가를 초월하여 부 처 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그러한 실천을 통하여 자 신이 먼저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손이 닿지 못하는 저 높은 곳에 있 는 것도 아니며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하여 시설된 것도 아니다. 부처 님께서는 모든 중생을 위하여 성불의 계단을 마련하셨다. 누구나 올라 갈 수 있는 성불의 계단을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 하여 최상의 깨달음에 이르기 깐지 부처님께서는 친절하게 사 다리를 놓으셨다. 우리는 자기 눈높이에 맞추어 거기서 부터 성불의 첫걸음을 내디디면 된다. 누가 빨리 올라가느냐는 자기 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이제 불교는 어느 한 집단의 전유물이어서도 안 되고 반드시 출가라는 형식을 통하여서만 받아들여지는 그러한 불교가 되 어서도 안 된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누구나 함께 손잡고 걸어갈 수 있는 그러한 불교, 세속 가운데에서 민중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면서 성불을 향해 가는 그러한 불교라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당장 이 자리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느껴 볼 수 있는 그러한 쉬운 불교라야 한다. 불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와의 소통과 함께 일상생활을 깨달 음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

부처 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싶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 는 결국 우리 자신과 진리에 의지하는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 다. 그 길을 가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그렇게 보면 진리도 결국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출가승이 되든 재가불자로 남아 있든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서부터 비롯되고 그것을 푸는 열쇠도 결국은 자기에 게 있기 때문에 어떤 환경, 어떤 문제에 봉착하더라도 우리 스 스로 해결하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사회와의 소통없이 자신 에게만 침잠하게 되면 소승의 길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출가든 재가든 불자들이 자신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행복의 길을 찾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 르면서 자신의 능력과 활동을 통하여 사회를 이롭고 평화롭게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나 혼자 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연 기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결코도달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불자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밀교의 대 표적 경전인《대일경》에서는‘방편을구경’으로 한다고 했다. 이것은 깨달은 자라도 혼자만의 법열에 머무는 것 이 아니라 사회와 소통을 하면서 중생구제에 그 깨달음을 이바 지해야 진정한 성불이 된다는 의미이다.

일상생활에서의 인격도야가 성불의 초석이 다

불교는 오랜 세월을 경과하면서 교리가 세밀해지고 다양화 되었다. 그것과 함께 불교의 깨달음이란 것도 관념화되어 버린 경향이 강하다. 일반 불자들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추상적으로 너무 거창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들은 오르지 못할 나무라 고 생각하여 아예 불교 수행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리고 자신의 복이나 비는 식으로 흘러가 버렸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무르익 으면서 깨달음을 관념화해온 결과이다. 관념적인 깨달음은 자 신을 위해서나 인간사회를 위해서나 느다지 소용이 없다. 인간 사회에 무익한 혼자만의 관념적인 깨달음은 목석보다도 소용 이 없다. 인간사회에서 유용한 깨달음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그 렇게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열고 저잣거리로 돌아와 서 많은 대중들을 교화하신 것이다.

붓다의 원래의 가르침은 관념적인 깨달음에 대한 것이 아니 었다. 과거도 돌아보지 말고 미래도 걱정하지 말고 오직 이 순 간을 충실하게 살며 괴로움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이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교에 대한바른 이 해와 계행의 준수에 의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 일상생활 속 에서는 육바라밀의 실천과 오계의 준수를 통하여 자신을 제어 하며 오계의 확대를 통하여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필 요하다.

여기에 더하여 매 순간 자신을 놓치지 않는 자기 성찰이 필 우 수적이다. 매 순간 자신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은 일상생활 그 자체가 수행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고 일어나서 세수하 고 밥 먹고 일터에 가서 자기 일을 충실히 하는 그 과정 모두가 수행이 되어야 한다. 운전을 하거나 접시를 닦고 방청소를 하 며 사람들과 일에 대하여 의논을 하는 그 모든 과정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성불이라는 완전한 깨달음을 목표로 두기 전에 일상생활 가 운데에서 다만 1%라도 부처에 가까워지겠다는 노력을 하고 거 기에 맞는 결과를 얻을수 있다면 그것이 곧 1% 성불하는 것이 며 이러한 노력이 쌓이면 점점 완전한붓다의 모습에 가까워 질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성불이라는거창한목표 앞에 주눅이 들 어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수행의 자세이 며 이웃에 훨씬 더 큰 도움을 줄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 수행을 바탕으로 무한한 자비심과 함께 자기가 가진 사회적 역량을 힘껏 발휘하여 중생계를 이롭게 할 수 있 다면 그것이 진정한 붓다의 의도일 것이다. 일상생활 가운데에 서 계 . 정 . 혜를 실천하며 사회 속에서 대중들의 무지를 일깨 우고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정진하는 모습이 진정한 대승보살 의 모습이다. 여기에 무슨 출가, 재가라는 것이 큰 의미를 가지 겠는가?

승속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항상 스스 로를 주의, 관찰하면 서 자신의 무지를 타파하고 탐진 치를 다스 리며 자신의 능력과 소질을 최대한 발휘하여 모든 중생과 사회 에 이바지한다면 그것이 곧 불국정토를 이루는 길이 아니겠는 가? 재가불자는 오히려 출가자들보다도 인간사회의 현실을 더 잘 직시할 수 있으며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에 눈뜰 수 있는 기 회를 많이 가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현실적 시련에 부딪쳐야 하는 재가불자들이 때로는 출가승보다도 오히려 더 원만한 인격을 갖출 수 있고 더 많은 깨달음의 기회를 많이 가 질 수 있으며 인간사회를 위하여 이바지할 길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궁극의 경지는 깨달았다는 의식이 없이도 모든 것이 법도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불자들의 궁극 목표는 성불에 이르는 것이지만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훌륭한 인격을 갖추 는것이 먼저이다.

가정과 사회에 머물면서도 거기에서의 역경과 시련을 수행 의 도구로 삼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잘 실천하고후세에 이어 간다면 그것 이 곧 훌륭한 승보가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그렇 기 때문에 사회와의 소통은 성불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은둔수행 자가 반드시 더 빨리 깨달음에 이른다는 생각은 이제 현대사회 에는 맞지 않는 진부하고 고루한 생각이다.

불교를 생활화하고 생활을 불교화하게 되면 일상생활의 모 든 것이 불법 아닌 것이 없고모든불법은 일상생활을 지혜롭게 영위하기 위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중생 들과의 소통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중생 속에서의 일상생활 을 기반으로 하여 한 걸음씩 나아갈 때에 완성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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