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소식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불교와 훈민정음

페이지 정보

호수 273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8-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지혜의 눈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태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칼럼리스트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8-03 12:43 조회 1,737회

본문

불교와 훈민정음

훈민정음,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의식의 결과물
불교의 영향은 15세기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대한 기준은 다양합니다. 19세기에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事實)을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것을 역사학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면, 20세기에는 역사가의 사관(史觀)에 의해 해석된 역사라는, 역사가의 주관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변해왔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역사적 사실은 하나가 아니라 복수이고 따라서 역사해석의 다원성을 주장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역사이해에 혼란을 주는 것
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낳기도 하지만, 역사적사실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용인하였고 역사이해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다양성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의 흐름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에서 15세기는 조선이 건국되어 국가의 체제를 세우고 정비하는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고려와는 단절되고 주로 정치적 사건에 의해 왕권이 안정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가 매우 독창적이고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뤘다는 문화사적 관점에서 다루면 매우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조선왕조가 이룬 성취는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저는 ‘천상열차분야지도’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그리고 ‘훈민정음’을 꼽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태조 때 새 왕조의 건국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민간에서 진상한 고구려 천문도를 바탕으로 돌에 새긴 것입니다. 이전에는 고구려가 이러한 독자적인 천문도를 제작할 정도로 국가 체제가 발전되었는가에 대한 회의로 부정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천문도를 모방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83년 일본의 나라에서 기토라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그 무덤의 천장에 천문도가 그려져있음이 알려지면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천문도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북위 39도에서 40도에 해당하는 위치에서 기원후 1세기경에 보이는 하늘의 별자리 새긴 것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나라 천문학자들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를 연구한 결과 평양 근처에서 바라본 별자리를 새긴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고구려는 독자적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의식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에 반영된 것이죠. 천상열차분야지도 이후 세종 때는 한양을 기준시로 하는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었는데 바로 ‘칠정산내외편’입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조선 태종 때 제작한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입니다. 지도에는 아프리카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해가 1492년이니까 태종 때의 이 지도는 당시까지 알려진 세계를 모두 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도에서 우리나라는 중국 다음으로 크게 그려져 있는데 다름 아닌 당시의 건국주체세력의 자신감이 반영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원나라 때 제작된 세계지도인 ‘성교광피도’를 저본으로하여 제작한 것이지만 조선의 영토를 실제보다 크게 그렸다는 점은 자주적 의식의 반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 15세기의 조선 전기의 문화는 특히 과학기술의 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이뤘습니다.
그리고 ‘훈민정음’은 중국과 다르다는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의식의 정점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하겠습니다. 표음문자인 훈민정음은 같은 표음문자인 원나라의 파스파 문자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하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고 나아가 이러한 문자에 익숙한 당시의 불교승려가 훈민정음 제작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웠지만 15세기에는 여전히 고려시대의 분위기가 강했고 특히 과학기술분야의 성취는 고려의 유산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점은 성리학이 주류로 자리잡은 16세기 이후에는 15세기처럼 과학기술의 업적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습니다. 성리학에 비해 과학과 상대적으로 친밀한 불교의 영향이 15세기 과학기술의 발전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