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람의 주존 -불상
페이지 정보
호수 83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6-10-02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한국불교미술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01 07:02 조회 2,965회본문
오랜 믿음과 정성의 역사와 삶의 산실
이러한 국내에서의 불상 조형에 있어서는 그 모범이 먼저 중국에서 전 래한 불상에 있었으며, 이어서 동양을 하나로 묶었던 불교 제국의 긴밀한 교류를 통하여 혹은 서역 혹은 멀리 인도와 간접 또는 직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동양 각국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인물과 조형이 서로 교류되는 시기로는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통일 신라 시대를 먼저 들어야 할 것이다. 이때는 바로 일찍이 없었던 번영을 누리던 당대에 해당하는 시기 이다.
통일과 평화의 두 가지의 요건은 그대로 불교 조형의 발달에도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삼국 각국의 불교 수입과 그에 따른 중국 남북조와의 교통에서 이룩된 불상 조성의 지방은 마침내 하나로 합쳐져서통일된 넓은 국토를 무대로 신라통일 시대의 번영을누렸던 것이다.
불교 전래 초기에 있어서 금동 불상이 조성된 것은 각국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이처럼 금동상으로 법당에 안치된 것은 거의 지금까지 전하고 있지 않다.
또 금동상 이외에 목상이나 토상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 자료가 취약하므로 오늘날까지 전래하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금동상에 이어서 볼 수 있는 것은 삼국 말기 600년을 전후 하여 우리나라 곳곳에서 많이 생산되는 화강암을 재료로 조성된 석상을 들 수 있는데, 불상은 자연 암벽에 마애든지 또는 작고 큰 원각상으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석각상의 발생과 발달은 그 후 신라 통일기에 들어 융성하여서, 마침내 경주 토함산 석굴상 같은 걸작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여세는 그 후 고려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고대의 불상은 거의 이들 금동상(철상 포함)과 석상이라 할 수 있다.
애석한 것은 근세로 넘어오면서 불교가 국교의 자리에서 전락하여 산간 불교로 겨우 명맥을 이어 왔으며, 역대에 걸쳐 여러 차례 치렀던 외적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당대의 조형을 거의 탕진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난은 사사성장 하던 경주에서 오늘날 불과 몇 개의 고대 사원이, 그것도 퇴락되고 축소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실정에서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일찍이 황 룡사에서 전래하던 신라 3보의 하나인 금동 3존불과 그 장엄이 지금까지 전래하였던들 그것 하나만으로써도 신라의 불상 조형을 대표시킬 수가 있었을 것이다.
고대의 불상 조형은 그 시대의 믿음을 차례로 구현하여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들의 형식이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서 혹은 삼국 시대에는 상징적 특색을 보였고, 신라 통일기에 이르러서는 사실적 특색을 발휘하였 던 것을 비교하여 보면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양식과 그 내용이 시대에 따라 변천하여 왔다는 사실은 그들의 기교에서 나타나기도 하였다. 동시에 불교는 그 수입 당초부터 나라의 다른 여건과 일치하고 먼저 그 지배 계 급의 믿음을 받아 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불교 그 자체가 정치 와 연결되어서 각 시대의 국가적 요 청과 국민 기원에 부응하여 왔다는 사실이다.
신라 시대에 있어서 미륵에의 믿음은 곧 나라의 최대 과업인 통일 국가의 형성과 일치하였으며, 그를 위한 국민의 단결과 헌신이 또한 이곳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곧 미륵상의 조성 혹은 여래상, 보살상으로 표현하면서 마침내 오늘날의 금동 또는 석각 의 걸작을 남긴 근본 요인이라고 하겠다.
또 신라가 통일을 성취하면서 많은 사원을 건립하였을 때 그 당초에 있어서의 성격이 호국이 있었던 것은 통일 초기 사찰의 성격에서 알 수가 있다. 그러나 8세기에 이르러 왕실이 나 귀족의 사사로운 기복을 목적으로변모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추세는 9세기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또한 사원의 원당 으로서의 성격은 8세기 중엽의 불국 사에서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석굴암 에서도 볼 수가 있는데, 이들은 아직 도 호국적 성격을 함께 지니고 조성 되었던 것이다.
8세기에 들어서서는 아미타불상이 더욱 유행하였는데, 석굴암 본존은 석가 여래상이라는 종래의 통칭을 떠나 다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또 신라 말에 이르러 비로샤나불이 금동상과 석상 가릴 것 없이 등장하는 사실도 아울러 주목하여야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에 따르는 불상 조형의 변 천은 고려에 들어서 점차 토착화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생각된다.
불교가 더욱 우리 자신의 믿음과 접근하고 재래의 토속 신앙과도 융합되는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불상 조각 그 자체는 신라 말 이래 쇠퇴의 추세를 보인다.
전대의 조형을 모범으로 삼기는 하였으나 멀리 미치지 못하였으며 그러 한 대세는 그대로 조선조에 계승되었 던 것이다.
그러나 불상 조각의 전통만은 시대에 따르는 기복을 겪으면서 근세까지 계승되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불교 미술 그 자체가 지니는 강인한 보수적 성격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 불상 조각의 영광은 고대에 있었고, 이에 따라 삼국 이래의 걸작이 지금까지 전래되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또 기적도 아니다. 그것은 그 들을 수호하여 온 믿음과 정성에 의 해서 비롯된 것이다. 그 믿음과 정성 을 우리 선인들은 지녀왔으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오랜 믿 음의 역사와 삶을 이어 왔던 것이다.
불상 자체의 양식적 고찰에서 시대의 판별과 우열을 가리는 기준을 삼으면서 동시에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믿음과 기원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 이다.
이처럼 고대의 불상이 그 양식과 내실의 양면에서 고찰될 때 참된 모습과 이해에 더욱 접근할 수가 있을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