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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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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33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10-12-06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교리/건강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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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3 09:21 조회 2,8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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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총지화 스승님 달라이라마 친견기 (3회)

마음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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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화 스승과 한국의 비구니 스님들이 달라이 라마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제 의식의 자성인 진여를 말하겠습니다. 유식 에서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며,〈능가경〉에서 ‘외 경은 마음의 현현일 뿐’ 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 셨습니다 이에 월칭보살은 다르게 해석합니다. 부 처님께서 ‘마음이 주된 것아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설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부처님께서 필요에 의해서 말씀하신 것이지 중관 입장에서는 궁극의 견해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보이신 것은 어리석은 이들의 두려움을 끊기 위해 서 이지 진여는 아닙니다.〈십지경〉에는 유식의 견 해와 관련한 말씀이 있지만은 글자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 유식에서 말하는 삼성설은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으로 차단해야 할 것입니다. 변계 소집성 이며 변계소집의 바탕이 의타기성입니다..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변계소집성으로 이를 끊은 것이 원성실성입니다.

중관의 자립논증과 귀류논증에서는 삼성설의 해석이 각기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 삼성은 모두 무자성이 라고 말합니다. 유식에서는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은 성립되지 않고 원성실성만이 성립됩 니다. 무자성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서 단견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3종 법륜을 굴리니〈해심밀경〉이 그 중 하나이지만 중 관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의 가르침들은 중생이 지닌 관행과 근기에 따라 가리킨 것이며 이로서 성 문, 연각, 모살성 등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중생 각각이지닌 의식 수준의 차이에 따라서 다양한 것 입니다. 또 다른 경에서는 궁극적으로 보살승으로 서 오직 일승뿐이바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모두 대기 설법인 까닭입니다.

〈해심밀경〉에서 이야기 하는 요의 불요의를 구분하는 방법과 대승경〈십지경〉의 분류 방법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취사하는 구별을 위해서라도 다른 경과의 비교가 있어야 할것입니다. 이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이치로서만 분류가 가능합니다.

대승의 견해에서는 불요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따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승법은 무아입니다. 이는 제법이 모두 무아이며 마음은 무 시이래 난적이 없습니다.〈무상요가탄트라〉에 의하면 외부의 대상이 실체가 없고 무자성의 법성임을 이야기 하지만 마음을 제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마음의 법성을 수행하는 것이 주된 중심입니다. 외 부의 대상이 무자성인 바와 같이 인간의 마음은 객 체와 주체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유가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서 경계에 이른 청정한 마음이 자증분의 대상이라고 합니 다. 마음의 특별한 실체가 있다는 것은 훈습 종 자의 발현이라고 봅니다. 이는 창조주를 인정하 는 외도의 수론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마음 의 정계가 현상에 불과하기에 마지막에는 아뢰야식 만이 남게 됨으로 부처님과 가까이 된다는 것이 유 식의 견해입니다.

중관에서는 성천보살의〈400송〉에 나온 이치와 같이 지나간 것은 존재하지 않고 미래의 것은 얻음 이 없다고, 봅니다. 현재의 의식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현재 나를 존재하는 근거가 되는 실제가 바로 제8아뢰야식이라고 유식에서 주장하기 때문에 과연 이것이 현재 의시인가는 명확히 해야 할 것입 니다.

〈보리심석〉의 32번째 게송의 경우에는 정확히 해 석하고 있지 않습니다.〈대승장엄경론〉에 의하면 어떤 조건과 만났을 때 인식과 그에대한 작용이 일 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은 진실이 아 니면서 진실인 듯 하게 하여 윤회의 동력이 됩니 다.

의식에 의해서 의식 대상을 알 수 있으므로 인식 대상 없는 의식은 없습니다. 중관의 입장에서 마음 이 진실로 성립되고 자성이 있다면 자체에서 의지 하지 않고 성립돼야 합니다. 인식하는 대상과 주체 는 상호 의존적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불변의 자성은 없습니다. 그렇기 에 마음은 이름에 지나지 않으니 이름과 달리 존재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언어 또한 관 념일 뿐이지 변치 않는 자성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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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화 스승이 한국 스님들과 함께 달라이라마 법문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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