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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념처(5) 관사성제-멸성제1-열반의 의미와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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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78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4-09-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불교의 선정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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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정사 필자정보 철학박사 중앙교육원장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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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24 10:03 조회 2,30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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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불교의 선정 (31회)

법념처(5) 관사성제-멸성제1-열반의 의미와 종류
멸성제는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열반을 의미

법념처 수행의 마지막이 사성제를 관하는 것인 데 그 중에서도 별성제는 괴로움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 환자로 치면 병이 완 전히 나아 정상인 상태로 돌아온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고성제와 집성제를 관하는 것이 병의 상 태와 병의 원인에 대한 진단이라면 멸성제를 관하는 것은 병 이 완전히 나은 상태를 관하는 것으로 집성제에서 말하는 갈애가 완전히 소멸한 상태에 대한 고찰이다.

멸성제는 간단히 멸제라고도 하는데 불교의 궁극의 목 표이며 최후의 이상이라고 하는 열반을 가리킨다. 삼법 인에서 말하는 열반적정이 곧 이것이다. 갈애를 멸하여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괴로움을 멸한 경지가 해탈이고 열반아다. 이것은 모든 것이 고라는 일체개고와 반대되 는 개념이다. 깨닫지 못한 무명중생의 생사윤회의 상태 가 일체개고라면 생샤를 초월하여 모든 괴로호에서 벗 어난 성자의 상태가 열반적정이다. 열반이나 적정은 같 은 말인데 어떤 것을 열반이라 하는지 더 구체적으로 살 펴보자

먼저 열반에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이라는 것이 있다. 유여열반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과거의 선악업의 과보로써 얻어진 육신 이 남아 있는 한 완전한 열반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이 있는 한은 완전히 윤회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해서 무여열반이라는 것은 업보에 관계된 육 신까지도 완전히 없어져 버린 뒤에 얻게 되는 완전한 열 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것을 반열반이라고 도 한다. 부처님의 입멸을 중심으로 설해진《대반열반경》의 반열반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여 열반이나 무여열반의 개념은 열반을 실채시하는 당시의 일반적인 인도인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윤 것으로 불교에서는 원래 이런 개념이 없었다. 육신이 없어진 후에 완전한 열반이 얻어질 수 있다는 이 러한 생각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취지와는 다른 것 이다.

원래 열반이라는 말은 타던 것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 다. 활활 타오르던 탐진치의 불꽃이 수행에 의하여 잠잠 하게 꺼진 상태가 열반이다. 경전에서는 열반을 한 마디 로 정의하여 ‘탐욕이 멸하고 진에가 멸하고 우치가 멸한 것,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즉 탐진치 의 삼독의 번뇌가 완전히 멸한 것이 열반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은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서 아 무 것도 없는 회신멸지의 상태가 아니다. 즉, 죽어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 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과는 다른 것이다. 불교에 서 말하는 열반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모든 번뇌가 멸 해서 마음이 적정안온의 이상적인 상태에 있게 되는 것 을 말한다. 이러한 상태의 열반에 대해 아함부의 경전에 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로《잡아함경》에서는 열반의 정의에 대 해 이렇게 나열하고 있다.


무위, 구극, 무루, 진제, 피안,미묘, 극난견, 불로, 견뢰, 불괴, 불가설, 불희론, 무장애,적정, 불사,극묘, 정복, 안온, 애진, 희유, 미중유, 무재, 무재법, 이것이 열반이라고 선서께서는 말씀하셨다.


경전에서 설한 이러한 열반의 정의를하나하나 살펴보 자. 먼저 여러 가지 열반의 정의 가운데에서 열반을 ‘무 위’라고 표현한 것이 있다. 이것은 업을 짓는 것은 더 이 상 없다는 뜻이다. 열반은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번뇌를 일으키는 행위는 없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구극’이라는 것이 있다. 궁극적으로 도달해 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열반보다 더 나은 것은 없기 때 문에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무루’라는 것이 있다. ‘루’라는 것은 더러운 번뇌를 말한다. 열반은 그 번뇌가 다소멸된 것이기 때문 에 무루라고 한 것이다. ‘진제’는 열반이야말로 참된 진리 라는 뜻이다. 세간법인 속제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열 반은 변함없는 진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피안’은 괴로움의 이쪽 언덕에서 안온한 깨달음의 저쪽 언덕으로 건너갔다는 뜻인데 열반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말이다. 흔히 ‘도피안’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 이다.

다음으로 열반을 ‘미묘’라고 표현하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훌륭한 것이 열반이라는 의미이다.

‘극난견’이라는 것은 열반의 경지는 매우 도달하기 어 렵다는 뜻이다.

‘불로’는 불사와 마찬가지로 늙고 죽음의 경지를 초월 해 있다는 뜻이다.

‘견뢰’라는 것은 다음에 나오는 ‘불괴’와 거의 같은 뜻으로 열반의 경지는 견실하여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뜻 이다.

변하고 허물어지는 것은 세간의 유위법이지만, 열반은 견고하여 변함이 없는 무위법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쓴것이다

또 열반을 ‘불가설’이라고 하고 있다. 열반의 경 지는 말 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직접 체득 해 봐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음식이 아무리 맛있 다고 설명해줘도 직접 먹어보지 않고는 그 진정한 맛을 모르는거과 같다는 뜻이다. 혹은 누군가가 장엄하고 감 격스러운 장면을 보고나서 다른 사람에게 그 때의 그 감 동을 아무리 잘 설명해줘도 그 사람은 남이 보았던 그런 광경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것과 같이 열반의 경지도 스스로 체득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렇게 ‘불가설’이라고 말한 것이다.

‘불희론’이라는 것은 헛된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이다. 열반은 죽어야만 체험할 수 있는 우리의 경험과 지 각을 넘어선 세계도 아니고, 단순한 형이상학적 논의의 대상도 아니라는 뜻이다.

누구나 바른 견해를 지니고 수행을 하면 체득할 수 있 는 그런 경지이기 때문에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장애’라는 것은 어떠한 구속과 속박에서도 자유자 재한 경지가 열반이라는 뜻이다. 생로병사를 비롯한 모 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절대자유의 경지가 바로 열반이라는의미이다.

‘적정’이라는 것은 번뇌의 불길이 다 꺼져서 더 이상 흔 들림이 없는.고요한경지를말한다. ‘불사’는 앞에서 말한 ‘불로’와 같은의미이다. 태어남과죽음의 경지를 이미 초 월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죽음은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무명과 헛된 망상에 의해 만들어진 삶과 죽음 이 현실을 있는그대로통찰하는 여실지견에 의하여 그 실상을 드러냄으로서 윤회를 벗어난 것이 불 사의 경지이다.

‘감로’는 더 할 나위 없이 안온하고 편안한 경지라는 의 미이다. 갈애의 불꽃으로 목이 타 들어 갈 때 시원한 물 로 축여주듯이 열반은 더 이상 탐욕과 집착의 갈증이 없 는 경지이다.

‘극묘’라는 말은 극히 미묘한 경지라는 뜻이다. 말로 표 현할 수 없는 묘하고도 묘한 경지가 열반이라는 뜻이다.

‘정복’은 한 점의 번뇌도 없는 참된 복을 누리는것이 열 반이라는 의미이다. 세간복은 다할 때가 있지만 열반에 의해 누리는복은 끝이 없으며 가장 뛰어난 복이다.

‘안온’은 편안하고 흔들림이 없는 경지가 열반이라는 의미이다.

‘애진’은 애욕이 다한 것이 열반의 경지라는 뜻이다. ‘ 애’는 갈애로서 탐진치를 말한다. 그리고 이 갈애의 밑 바탕에는 무명이 자리 잡고 있지만, 지혜에 의하여 무 명이 멸해지고 탐욕과 집착의 갈애가 다한 경지가 곧 열 반이다.

‘희유’라는 말은 ‘미증유’라는 말과 비슷한 개념으로서 아주 드물다는 뜻이다.

완전한 열반은 부처님만이 증득하셨다. 이것은그만큼 우리 중생들의 무명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이기도 하다. 열반의 경지는 부처님처럼 지혜를 지니신 분에게나 가능한 드문 일일뿐더러 역사상 그 누구도 도 달하지 못했던 일찍이 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미증유라 고하신 것이다.

또 열반을 ‘무재’라고 한 것은 모든 재난이 없는 경지 가 열반이라는 뜻이다. 열반은 생로병사와 온갖 괴로움 을 벗어났고 더 이상 업의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어 떠한 재난도 더 이상 닥치지 않는다. 모든 괴로움을 초 월했기 때문에 무재라고 하는 것이다. ‘무재법’이라고 하 는 것은 괴로움을 초월한 경지를 드러낸 것이 열반이라는 뜻이다.

이상과 같은 열반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하 여 열반의 개념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열반의 경지는 말로도 나타낼 수 없고 지극히 미묘하며 증득하 기 어려운 것이지만 형이상학적인 헛된 논의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명을 제거하고 탐진치의 불꽃을 남김 없이 끄는 것에 의하여 도달되어지는 열반은 생로병사의 모든 괴로움을 초월하여 허물어지지 않는 영원한 안락을 누리는 것이 다. 그리고 열반이라는 것은 결코 죽어서 아무것도 없게 되는 회신멸지의 상태가 아니라 진리를 자각하고 실천 함에 의하여 얻어지는 절대 안온의 경지이다.

열반이라는 것을 보통 생사를 초월했다든가 불사의 경 지라는 말로 표현을 하는데, 죽음이 없다든가 생사를 초 월했다고 하는 것은 생사계의 바깥에 따로 열반의 세계 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현실을 떠난 열반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사가 열반이요, 열반이 곧 생사’라고 말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의 현실 세계 가운데에서도 열반이 찾아 질 수 있다는 말이다. 번뇌가 있고 생사가 있기 때문에 열 반이 있다. 번뇌가 없다면 열반이라는 것도 없다. 도피안 이라는 말을 쓰지만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이 세계를 떠나서 달리 열반의 세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 다. 열반의 진정한 의미는부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잘 알수 있을것이다.

석가모니부처 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 으신 후 80 세로 입멸하실 때까지 늘 열반의 상태로 계시 면서 교화를 하셨다. 열반이 반드시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석가모니부처님의 이러한 열반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 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열반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 럼 탐진치 삼독이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지혜에 의하여 무명을 제거했을 때에 얻어지는 절대 평안의 경 지이다. 그리고 그 경지는 우리가 사는 이 현실세계를 떠 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내면세계가 바뀌어 짐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위없는 지혜에 의하여 미망에 덮인 존재의 실상이 드 러날 때 우리가 겪고 있는 괴로움이라는 것이 모두 우 리의 무명에 의하여 나타나는 번뇌라는 것을 깨닫게 되 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분만 아니라 최고의 깨달음 을 얻어 아라한이 된 성자들은 모두 생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열반에 있어서 생사라는 것은 객 관적 사실로서의 생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명이 없 어졌기 때문에 생사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나타 내는 말이다.

생사윤회의 세계라는거은 선악업의 지배를 받고 업 보에 좌우되는 것인데 무명 중생들은 거기에 집착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지혜의 등불에 의하여 일체의 번뇌를 태워버리고 깨달음을 얻은 성자는 더 이상 집착하고 두

려워할 것이 없다. 집착하고 두려워할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유자재의 삶을 살수가 있 다. 생사윤회의 세계에 머물러 있어도 이미 그것을초월 해 있기 때문에 자기의 고락이나 일신의 안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혜로써 무명을 밝히게 되면 마음에 장애되는 것이 없고, 장애가 없게 되면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모든 잘 못된 망념을 여의게 된다.《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마 음에 걸림이 없으면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고 잘 못된 생각을 여의어 마침내 열반을 얻게 된다’ 라고 하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라 고할수있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에 이른 부처님께서는 무애자재로 써 오직 중생 제도에 전념할 따름이다.

밀교의 경전인《대일경》에서 ‘방편을구경으로 삼는 다’고 하는 것도 성불의 궁극적 경지가 바로 중생제도를 위한 방편의 활용에 있다는 뜻이다. 열반을 얻은 성자에 게 있어서는 이 세계가 그대로 불국토이다. 불국토가 객 관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깨침을 얻은 자의 마음의 상태가 변하기 때문에 불국토가 나타나는 것이 다. 너와 나의 분별도 없어지고 집착하고 두려워 할 아무 것도 없어지기 때문에 깨닫는 순간 이 세계는 그대로 불 국토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확대되어서 무명 중생에게까지 미쳐지는 것이 자비이다. 우리는 이 러한 깨달은 성자들의 자비에 의하여 서서히 괴로움에 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 가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열반에 무주 처열반이라는 것이 있다. 생사에도 머무 르지 않고 열반에도 머무르지 않는 무애자재의 경지가 이 무주처열반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며 이상은 바 로 이 무주처열반이며, 깨달아서 무주처열반에 머무르 는 분들은 어떠한 걸림도 없이 오직 자비로써 무명 중 생에게 지혜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석가 모니부처님의 삶은 바로 이 무주처열반을 보여주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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