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언행자의 가족을 찾아서- 정심사 박옥란 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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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88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7-03-01 신문면수 12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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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05 18:32 조회 2,183회본문
"매일매일 부처님 가피 느껴요"
공양처에서 연락이 왔다. 누가 신문기자를 찾는다며 ‘진언행자 코너 취재원과 약속한 시간은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누굴까’하면서 카메라를 챙겼다. 웬 노보살님이 빵 한조각과 커 피를 놓고 드시고 계시는데 한 눈에도 오늘 취재할 분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무 닮으셨으니까.
“점심은 빵, 커피로 해결해요. 벌써 오래 됐어요. 소식도 하게 되고 식탐도 줄이고…”
‘연세 많은 노인분들은 의례 따뜻한 밥과 국을 드시는데 이 보살님은 사고방식이 좀 다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옥란(법명:수장85)보살. 일제시대 당시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기여고를 나온 소위 인텔리 여성이었다. 졸업 직후부터 초등교직에 평생을 헌신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가르쳐야 하는 오랜 교직 생활이 몸에 밴 것일까. 어딘지 모르게 합리적 이고 개방적인 느낌이다. 여든이 넘은 분 같지 않게 활기차고 정정해 보이고.
“고교 동창회다, 제자들 모임이다, 이곳 저곳 많이 다니다 보니 고독하다거나 늙는 걸 한탄 할 틈이 없어요. 제 주위에는 지금까지 일하는 동기들도 여럿이죠”
바쁘게 사는 것이 노익장의 비결인 듯. 박옥란 보살은 몸만 바쁘게 지내는 것은 아니다. 마음 찾는 공부를 위해서도 분주하다. 수십년 전에는 숭인동 밀인사 2대 신정회장을 맡아 전 법과 수행에 힘썼고, 여든 노구인 지금까지도 상봉동 정심사로 불공을 다닌다.
40여년을 넘게 진언 수행을 해 고 있는 박옥란 보살은 하루도 불공을 거르는 일이 없다. 새벽불공은 물론 하루 두시간 이상은 정송한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오래 전에는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안팎으로 바쁘기 마련인 사찰 회장직을 맡아 충실히 수행해 냈다.
“다 불공 공덕이지요. 불공으로 어려운 일도 해내고 한 평생을 잘 지내 올 수 있었던 것 같 습니다. 매일 매일을 부처님과 함께 하니 은연 중에 부처님의 가피가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걸을 때에도 가슴을 쭉 펴고 씩씩하게 걷게 된답니다”
박옥란 보살의 이런 강한 내면은 어쩌면 어린 두 자식을 흘로 키우면서 다져지게 된 것이었는 지도 모른다. 결혼 초기 교사생활을 했던 박보살은 말단 공무원이었던 남편을 서울 사범 대에 진학시키고 학비를 비롯한 뒷바라지를 시작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무지개빛 꿈을 꾸던 때 6. 25동란이 터졌다. 남편은 그 와중에 행방불명이 됐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전쟁이 발발한지 얼마 안돼 누군가 교문을 걸어 잠그고 남아 있던 학생들을 부대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얼마동안 군사훈련을 시킨 후 전선으로 가던 중 폭격으로 사고가 났다는 것.
박옥란 보살에게 여섯 살 아들과 세 살 딸아이가 남겨졌다. 당장 생활비를 위해서 피란처인 목포에 가서도 교편을 잡았다. 당시 제자들 중엔 이름을 대면 알만한 전직 검찰총장도 있다고 한다.
“그때가 제일 어려웠어요. 전쟁통안엔 모두가 다 그랬지만 남편없이 어린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할 저는 그야말로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모성의 힘일까. 두 아 이는 잘 자라 주었고 큰 아들은 없는 학비에도 일류 공과대학을 무사히 졸업했다. 그 아들이 서울 총지사 신정회 총무 이인성(시공. 63)각자. 종단의 대소사에는 이 각자가 꼭 있다. 모든 불공 에도 빠짐 없이 참석하고. 그야말로 성실하고 모범적이라는 말이 참 어울리는 사람이다. 오랜 동안 염색관련 무역업체에서 국내외를 오가며 활약했다. 요즘엔 최근 설립한 건설업체 일을 보는 틈틈이 총지사에 나와 49불공을 올린다. 어떤 성취가 있었냐는 물음에 일상을 여일 하게 살아 내는게 성취라면 성취란다. 그리고 는 소박하게 말한다.
“어머니께서 40대에 건강이 아주 안 좋으셨어요. 고생만 하신 어머니를 위해 정성껏 불공을 올렸습니다. 그 이후 몰라보게 건강해 지셨고요. 그리고 대학 학비가 없어 학업을 중단해 야 했었는데 부처님께 간절히 매달린 덕인지 무사히 졸업을 하게 됐습니다”
이 각자는 어머니보다 한 해 먼저인 64년 고교졸업 직후 상왕십리 진각종 심인당에서 진언행자가 됐다. 독실한 교도였던 둘째 이모(박용란. 작고)의 권유가 있었다. 둘째 이모는 밀인사 초대 신정회장을 지낼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청주로 이주해서는 혜정사 중창불사에 앞장 섰고 며느리를 입교시켜 승직자로 만들기까지 했다.
이인성 각자의 수행방법은 한 마디로 ‘참회와 감사’다. 다겁생래로 지어 온 업장과 현재에도 알게 모르게 짓는 일체 업장을 지심으로 참회한다. 그래서 육자진언을 한 번 하고 ‘잘못했습니다’를 반복한다.
‘뉘우치고, 다시 짓지 않겠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매순간 다짐을 한다. 이와함께 자신을 지금에 있게 한 선현과 조상, 여러 사람들의 노고에 감사한다.감사하는 마음을 내면 모든 인연이 인드라망 처럼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일어나고 자연 따듯하고 안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 그게 불교의 자비심 아닌가. 그래서인지 이인성 각자는 늘 온화하고 온건하다.
이런 이 각자에겐 오랜 바램이 있다. 신정회 중앙회 결성이 그것. 그 동안 여러차례 추진을 했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우리 종단의 발전을 위해선 꼭 필요한 모임입니다. 전국의 신정회 지회를 찾아 다니며 협의를 했는데 정성이 부족했나 봅니다” 요즘엔 바램이 아니라 걱정스럽기까지 하다는 이 각자는 종단과 교도가 뜻을 모아 중앙회 결성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옥란 보살의 딸인 이혜성(자성각. 60) 보살도 밀인사 교도로 오랜 동안 진언 수행을 해오고 있다. 내력일까. 환갑의 나이라는게 믿기지 않게 너무 젊어 보인다.
“인과응보,자작자수의 이치를 명심하고 부지런히 작복하고 있습니다. 그 복은 수행이 뒤따라야 결실이 맺어지겠 을 전하는 데에도 열심이다. 매주 수요일 총지사에서 있는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노래를 하면 심신이 즐겁고 편안해져요. 부처님의 말씀을 아름다운 선율에 실어 전하는 일이니 더욱 신심이 나고 행복하답니다”
40여 성상을 진언 수행으로 일관해 오고 있는 팔순 노모와 그 곁에서 아들과 딸로, 때로는 수행 도반으로 지중한 인연을 이어 온 세 사람.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시대, 해방 전후의 혼란기와 전쟁, 가장의 공백에서 있었을 어려움을 겪은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평온하고 다정하기만 하다.
윤우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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