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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행자의 가족을 찾아서- 국광사 김연조 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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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89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7-04-02 신문면수 12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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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07 06:18 조회 2,48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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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행자의 가족을 찾아서- 국광사 김연조 교도
"어떤 일도 두렵지 않아요, 육자진언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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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경주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찬란한 불교문화가 꽃피었던 곳이라서 더욱 운이 좋으면 유명한 보문호 벚꽃구경도 할 수 있을거란 기대감도 있었고. 화신은 늦게 올라왔다. 대신 노란 산수유 꽃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국광사로 가는 길가 경찰서 안뜰에 오랜 풍상을 겪었을 것 같은 삼층석 탑이 서 있다. 역시 불적지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착한 보살”

멀리 대구경북 교구 국광사가 눈에 들어 왔다. 도량이 아늑해 보인다. 오랜 불공기도가 행 해지던 곳이라서 일까. 편안한 느낌이다.

“우리 착한 보살 인터뷰 잘 써주세요!” 한가로운 봄 낮 과수에 흙을 북돋고 있던 스승님이 그러신다.

착한 보살이라는 말에 미소가 지어졌다. 국광사 금강심 보살(김연조. 54)은 착한 보살일 수 밖에 없다. 초등학교때부터 진언수행과 인연이 된 이후 지금까지 40여년이 넘게 절에 와서 불공과 온갖 불사를 돕고 있으니 말이다.

금강심 보살 집안은 참으로 불연이 깊다. 할머니와 친정 어머니가 진언수행을 하셨고, 친정 다섯 형제들이 모두 절에 다닌다. 뿐만아니라 삼촌과 고모, 사촌오빠와 동생이 승직자다.

“온가족이 모두 교도이다 보니 좋은 점이 많아요. 무엇높다 때와 장소에 구애없이 불공을 할 수 있는 것이 복입니다. 다른 곳에선 남에게 지장을 줄까봐 못 그러거든요. 어떤 경우엔 화장실 문을 잠그고 진언 염송을 하기도 했답니다, 하하. 그리고 같은 종교 같은 수행을 하니까 자연스럽게 부처님 법으로 한 몸 한뜻이 되고, 항상 정성으로 화합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금강심 보살의 신행생활이 줄곧 순 탄하지만은 않았다. 스물 다섯에 시집을 갔는 데 시어머니의 신앙이 달랐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신앙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금강심 보살은 처음엔 진언행자라는 것을 숨기고 시어머니의 뜻대로 처신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도를 넘어선 신앙은 급기야는 삿된 쪽으로 흘러 갔다. 무슨 일인지 금강심 보살은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에 실려 가면 병명을 모른채 되돌아 나오기 일쑤였다. 온갖 크고 작은 장애도 생겨 났다.

그러던 중 어느 때 시어머니가 오신 날 마침 친정 어머니가 다니러 오셨다. 그날도 시어머니는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셨는데, 친정 어머니는 방안에서 애면글면 했다.

“음마니 반메훔, 옴마니 반메훔...” 관세음 보살의 본심 육자 대명왕진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모녀가 안팎에서 지극하게 염송을 했다. 어머니의 간절한 정성이 닿은 것인지 그 날 이후 시어머니는 일체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고 아픈 몸도 씻은 듯이 나았다.

아주 나중에 친정 어머니는 그날 얼마나 애타게 육자진언에 매달렸는지 모른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인생 고비마다 부처님께 의지

금강심 보살은 남편이 하는 사업장관리로 쉴 틈이 없는데도 불공과 사찰 참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회사에 일이 있을 때는 새벽에 절에 나오고, 자성일, 월초불공을 철저히 지킨 다.

사무실에 고객이 없을 때에는 육자진언을 암송한다. 하루 최소한 염주 21회씩 여섯 번을 정해 놓고 염송한다. 한 20회쯤 염송하는 중에 손님이 와서 중단됐을 경우는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어떤 날에는 진종일 염송을 해도 못 끝낼 때도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언제나 늘 변함없이 외우는 항송이다.

IMF를 전후해 사업이 파산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이런 항송공덕으로 난관을 헤쳐나올 수 있었다.

“그 당시 모든게 바닥까지 갔어요. 극단적인 생각마저 했었습니다. 남편 원망도 많이 했구요. 모든게 일체유심조라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아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조심해서 공부를 계속하다보니 어느 때부턴가는 이해가 되고 괴로운 순간을 넘어가게 되더라 구요. 원망심이 들때면 내 허물이 떠올려 지고 참회기도를 하게 되고요. 그때 진언수행이 없었다면 아마 자포자기했을 겁니다”

금강심 보살은 아들 자랑이 대단하다. 아들은 국내외 문화예술계 내로라하는 석박사급 인재들이 모인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닌다. 한예종에 최종합격을 하고는 모든게 다 어머니의 불공기도 덕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상경,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한예종에 들어 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말이다. 대학 면접때 얘기다.

면접관들의 질문공세에 제대로 답을 못할 때마다 어떤 면접관이 나서 분위기를 돌리고 대답하기 좋은 질문을 하며 마치 신중님처럼 자기를 돕더라는 것. 시험문제도 아주 익숙한 것 들이 출제되고, 습작품 제출 때에도 어려서부터 그려왔던 것들을 요구하더란다. 금강심 보살도 물론 부처님의 가피라고 여긴다. 그만큼 지성으로 불공을 해왔고. 이제 아들은 어머니의 수행생활에 가장 큰 후원자가 됐다 한다.

금강심 보살은 인생의 고비 고비때마다 부처님께 의지했다. 거기서 얻은 지혜로 세파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이제 무슨 일이 닥쳐도 두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겐 부처님과 육자진언이 있으니까요”

금강심 보살은 예전엔 깜짝 놀랄 때에는 “엄마야”를 찾았는데 요즘엔 “옴마니 반메훔”으로 바뀌었다며 활짝 웃는다. 보살에게는 어릴적부터 불러왔던 옴마니 반메훔이 따듯한 엄마품과도 같은 것이리라. 절문을 나서는데 그렇게 엄마품처럼 따듯한 햇살이 내리 비친다. 옴마니 반메훔! 윤우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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