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연주암 금륜보전과 호압사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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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62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3-05-06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산신각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종열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관악산 김종열 기자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31 12:01 조회 2,509회본문
서울의 조산으로 주산인 북한산과 도봉산을 감시 감독하는 관악산
관악산과 광화문 해태상
관악산은 한강 이남에 우뚝 솟은 명산이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 과천시와 경계를 이룬다. 높이 62310 로 서울 북쪽의 북한산, 한강 동쪽의 남한산과 더불어 서울을 둘러싼 자연 방벽이다.
관악산은 그 모양새는 꼭대기가 큰 바위 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갓 모양의 산’이란 뜻으로 관악이라 불렀다,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아 철따라 변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를 금강산에 견주어 소금강 혹은 서쪽의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 이라 부르기도 한다.
관악산 연주암 금륜보전(삼성각)
조선이 개국하고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건설한다. 하지만 풍수상 화산에 해당하는 관악산이 남쪽에 버티고 섰다. 관악산의 불 기운이 궁궐을 침입한다는 풍수상의 가정아래 물의 동물이며, 불을 먹고 사는 해태를 광화문입구에 세움으로 비보책을 세웠다. 당시 궁궐에서 가장 큰 재앙은 화재였다. 창경궁, 창덕궁, 경희궁, 덕수궁 등 조선의 궁궐들에는 화재를 막기 위한 비보책으로 곳곳에 해태와 청동 물 항아리를 만들어둔다.
관악산의 연주대 와 연주암의 숨은 이야기
관악산의 주봉인 연주대는 해발 629m에 위치해 있다.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 말사인 연주암이 있다. 〈연주암중건기〉등의 자료에 의하면 서기 677년 신라 의상대사가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정전하고, 그 아래 관악사를 세웠다 한다. 하지만 당시 유물과 문헌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연주암에는 관악사가 연주암으로, 의상대가 연주대로 이름이 바뀐 연유가 두 가지 전해내려 온다. 그 하나는 고려가 망하자 충신이었던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이 관악산으로 은신한다. 이들은 의상대에 올라 멀리 송도(개경)를 바라보며 고려 왕조를 그리워 했다. 이를 연유로 사모할 연, 주인, 임금 주를 써 연주대 라 불렸다는 설화가 있다. 둘째로, 조선 태종의 두 아들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에에 얽힌 설화이다. 태종은 왕위를 셋째인 충녕대군( 후의 세종)에게 물려주려 하자,두 대군은 정처 없는 유랑 길을 떠난다. 둘은 관악사를 찾아 왕위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려 했으나 마음은 더 혼란스러웠다. 이 둘은 관악사의 위치가 궁궐을 보기에는 어려워 40칸의 당우를 새로 건립하고, 지금의 자리로 사찰을 옮긴다. 후에 사람들은 이 두 대군의 뜻을 기려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바꿔 불렀다 한다.
일부 무속인 들은 관악산의 산주가 강감찬 장군이라 한다. 1990년 이전에는 고려의 충신 포은 정몽주였다. 관악산 자락의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로 지금은 장군의 동상이 들어서있다. 또한 최근 관악구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거리축제를 여는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관악산 산신이 자리한 연주암 금륜보전(삼성각)
관악산 연주암에 있는 삼성각은 다른 사찰과 달리 금륜보전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 네 칸짜리 전각이다. 전각의 내부가 달리 특이한 것이 있나 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타 사찰의 삼성각과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사찰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금륜보전이라는 이름은 칠성탱화를 칠성여래 부처님을 모셨기에 삼성각 보다는 한 단계 위인 부처님의 거처로 금륜보전 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찰에도 칠성을 여래의 형상으로 표현한다.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금륜이란 허공륜, 풍륜, 수륜과 함께 사륜을 이룬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지의 구성을 표현한 것으로 구사론 세간품에 설해진다. 그렇다면 칠성과 독성 나한을 금륜을 관장하는 왕으로 보고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역할에 중점을 두어, 금륜왕이 머무는 보전이라 칭한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금륜보전 안에는 칠성, 독성과 함께 산신이 모셔져있다. 산신탱 화기에는 1929년 주지 재예스님 등이 시주하여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산신의 모습은 상투를 튼 백발의 노인으로 여느 산신과 다르지 않다. 다른 특징은 오른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며 왼손으로 백익선을 잡고, 바위에 걸터앉지 않고 주칠한.사각 등받이 의자에 앉아있다. 산신의 오른편에는 두명의 동자가 시중을 들고, 왼쪽의 호랑이는 조선 후기 민화의 호랑이를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이다. 제작 연대가 1929년으로 일제 강점기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우리나라 호랑이의 강한 기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해학적인 민화적 수법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금륜보전은 1979년에 연주대와 함께 다시 중수 되었다.
연주암 금륜보전 산신탱화
관악산의 지맥 삼성산 호압사산신
호압사는 글자 그래로 호랑이를 누르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관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삼성산 자락에 자리한 호압사는 조선 태조2년(1391년)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이 사찰 역시 조선의 궁궐에 대한 풍수와 관련이 있다. 관악산이 불의 기운이고, 삼성산(당시에는 호암산)은 호랑이의 기운을 가졌다 전한다. 태조와 무학대사는 이를 제압하기위해 광화문에 해태와 남대문을 숭례문으로 이름짓고, 숭 자의 뫼 산자를 불꽃으로 표현하였다. 또 삼성산의 호랑이 기운을 차단하기 위해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사찰을 지어 호압사라 불렀다.
호압사는 약사전을 주전으로 하고 그 정면의 왼편으로 삼성각이 자리한다. 보통의 경우에는 주전각의 뒤편으로 자리하지만 비보사찰임을 감안한다면 경내로 들어앉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삼성각에 모셔진 산신탱화 역시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고 있다.
산신탱은 여느 산산랭과는 조금 다른 구성을 가졌다, 두 마리의 호랑이를 그려놓고 산신이 이중 한 마리를 깔고 앉았다. 이는 호압사의 비보기능을 나타내는 주요 상징이다. 산신의 주워로 세 명의 동자가 시중을 들고, 뒤로는 소나무와 선계의 과일인 복숭아가 열린 가지가 그려져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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