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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화엄종찰 소백산 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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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88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7-03-01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전통사찰 문화탐방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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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05 18:11 조회 1,4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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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화엄종찰 소백산 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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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 해동 화엄종 종조 의상국사가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이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 민왕 7년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 3년 (1377년) 조사당이 재건 되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 중 하나이며 경내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국보 제 17호 무량수전 석등을 비롯해 국보 45호 소조여래좌상, 국보 46호 조사당 벽화 등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부석사가 들어선 터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다. 그나마도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어 경사가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석사에 들어서면 국이 협소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다. 오솔길을 따라 절에 들어서면 높직한 석축단에 의하여 구분된 터에 드문드문 건물이 배치되어 있어 뒤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고 내려가는 길에는 건물 지붕 위로 보이는 전면 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기 때문 이다. 석양이 뉘엿거릴 무렵 안양루 쪽에서 멀리 도솔봉 쪽을 바라보면 펼쳐 있는 산맥의 연봉들이 장관을 이룬다. 초점이 되는 도솔봉 오른쪽 으로는 아스라이 죽령이 보인다. 가히 대단한 경승지라 할 수 있다.

부석사의 주불전으로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 있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화엄종은 비로불을 주불로 모시는데 화엄종찰인 부석사 주전에 아미타 여래를 모신데에는 사연이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 당시 웅장한 비로 부처님을 모셨는데 수일도 안 돼서 번번이 무너져 내렸다 한다. 그러길 여러차례 한 번은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이 곳은 아미타불을 모실 정토 계이라고 했다는 것. 그 이후 화엄도량 부석사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지게 됐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 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 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되 고도의 기 법들이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를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 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 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 방식이다.

부석사를 논하고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창건주 의상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다.

의상스님은 김씨로서 아버지는 김 한신이고, 신라 진평왕 47년 (625)에 태어나 78세(702)에 입적하였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출가하여 8세 위인 원효 (617-686)스님과 함께 입당 유학을 시도 하게 된다. 25세(650)때의 육로를 통한 제1차 시도는 실패하고 다시 해로를 이용하여 36세 (용삭 원년 신유, 661)에 입당하게 된다.

이때에 원효는 도중에서 발길을 돌리고, 의상은 당 사신의 배에 몸을 의탁하였다. 662년 지상사 지엄(602-668)화상을 찾아가니 특별한 예로 맞았다 한다. 그 후 의상스님은 화엄교학의 진수를 전수하였고 지엄 스님의 입적 3개월전인 7월 15일에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어 인가를 받았다. 의상 스님은 스승의 입적후 당 고종의 신라 침공을 알리기 위해 귀국을 앞당기게 된다.

그후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태백산에 부석사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사찰을 창건하고 화엄10찰을 중심으로 교화활동을 펴나갔다.

의상화엄사상의 특질은 그가 서민 불교적인 미타정토 신앙을 중요시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부석사에 무량수불을 모신 것이라든지 동해 낙산에 관음진신주처의 도량을 개설하는 등, 의상은 화엄사상에 미타 관음신앙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의상화엄학의 중요 한 특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레한 의상의 실천적 생애와 그가 끼친 발자취는 당시 신라인들에게 있어서 금산보개 여래의 화신으로 까지 받들게 했다.


의상대사를 사랑한 선묘낭자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 절에는 의상을 사랑했던 한 여인의 애절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 여인의 그림을 모신 조그만 건물이 무량수전 뒤편에서 답사객을 맞이 하고 있다.

의상은 ‘뜬 바위’가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았는데, 이 바위가 선묘 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힌다.

선묘의 사랑은 국경도 신분도 초월한 짝사랑이었었지만, 온 몸을 던져 끝까지 그 마음 변치 않고 용이 되어서까지 보호한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너무나 가벼운 사랑이 유행하는 오늘 날 세태에 교훈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이처럼 부석사는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경치와,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어우러진 반드시 한번쯤은 답사할만 한 절이다.

-이인성 각자


길도반 이야기

봉황산 쟈락 700M고지에 위치한 명찰, 우리나라최고의 목조건물인 부석사의 무량수전.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백팔계단을 삼보일배하는 마음으로 오르면서 함께한 도반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따스함. 숙연함이 내마음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데…

’심일화


진정한 수행자였던 의상의 치밀한 구도아래 이루어진 부석사!

일주문을 지나 맨 윗단 무량수전에 이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극락정토를 향해 나 자신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일여심


무량수전을 바라보면 선조들의 건축미에 반한다.

그 옛날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을 할 수 있었을까?

또한 석축을 보면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돌로 만든 축대를 쌓았다.

모든 사물들은 각자의 빛깔을 가지고 있고 또한 어우러져야 된다는 것을 느꼈다.

-대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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