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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대성사 멸도 제33주기 특집 종조 법설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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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66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3-09-03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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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29 12:59 조회 2,0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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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대성사 멸도 제33주기 특집 종조 법설 "인간"
생활과 교조를 원만하고 정당하게 결부시켜야만 생활불교가 되는 것이다.

과학문명이 발달할 수록 인간은 인간성을 잃고 향락적, 타락적생활에 주저하지 않고 있다. 과도한 향락은 타락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이시대 만큼 인간성이 요구되는 시대도 없으며 따라서 그 가치도 높아진다. 이것은 곧 종교 활동과 종교적 신앙생활에서 인간성을 높여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저마다 선 을 주장하지만 마음속에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는한 그것은 위선에 불과하다. 진실한 선이란다만 봉공이다.

이타 에 있는 것이다. 즉 소아 를 떠나 대아 에 봉사해야한다.

인간의 지식의 확대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인간과 이기주의적으로 각축경쟁하는 마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기로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지식이 악용되어서는 그 지식이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을 평화로운 인간 영락의 인간으로 고차원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는 지식 그것 보다는 먼저 인간이 되어야하고 적어도 인간성과 지식을 병진시켜야 한다.

인간은 불신을 받을때처럼 무가치하고 불유쾌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불신은 자기가 초래한 것이지 상대방의 탓도 아니다. 신임을 받는 것도 자신에게 있다. 정직과 성실은 불신을 몰아내고 인간의 신임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신임까지도 받게 되는 것이니 여기에서 가지 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 인생관을 옳게 세워서 살아야 한다. 인생관이란 그 자신이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문제며 그 보는데 따라서 자신의 처세문제, 어떻게 대처하며 행동하여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부수되는 것이며 귀결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생관이란 하나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과 직결되고 인생관이 지표가 되므로 올바른 인생관, 즉 그것이 옳고 그릇된데 따라 잘살 수도 있고 못살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목석이나 금수가 아니다. 그것은 그 의식 구조의 탁월성이니 바로 잘잘못을 아는 의식의 주인공이다. 이것은 곧 가치판단으로 확대되어 의식에만 그치지않고 행동화되어 생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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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 종조 원정 대성사께서 재세시 법어를 하시는 장면

 

선악의 판단은 결코 전통적인 교육의 결과로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든지 선천적으로 그것을 알만큼 판단의 가능성을 그 의식 기능속에 지니고 태어난 존재이다. 단적으로 인간은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가장 고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인간의 기본적이며 동시에 최대의 특유성인 참회하는 마음이다. 금수는 참회하는 눈물이 없다.

이 참회없이 교육을 통한 지식만 있는 자는 그 지식을 악용하여 자기의 죄과를 합리화하려 들고 선을 가장한 위선에 기교를 부리기를 힘쓰며 진정한 선을 부정하려든다. 그러므로 인간이 된 연후에 지식을 가져야 그 지식이 자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 선후본말의 원리인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악 하거나 본질적으로 선하기만한, 결정되고 완료된 존재가 아니다. 부처님도 어떤 사람을 그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어떤 고정된 운명에 결박시키지는 못하는 것이다. 쉽고 어려운 구별은 있을망정 인간에게는 그가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형성할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 보살도 되고 성불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다.

생활과 교조를 원만하고 정당하게 결부시켜야만 생활불교가 되는 겻이다. 교조를 위주로 한다면 생활은 교조의 노예가 될 것이요, 생활을 위주로 한다면 교조는 한갓 공염불에 불과하다. 이율배반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불설, 그것은 곧 인간생활의 향상을 위한 것이며 그에 입각한 생활은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내세와 피안을 하나의 실재하는 제이의 세계라고 볼때 흔히 현실적생활을 등한시하는 현실 도피적 인간으로 떨어질 위험성이 많다. 그 반면 내세나 피안을 부정하는 반종교적 인간에게서는 현실지상으로 현실적 해결에만 급급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않는 범죄적 위험성도 다분히 있다. 우리는 인간의 현실속에는 이미 피안성이 주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심성에는 내세와 피안의 심층이 있다. 피안과 극락이 자기 마음에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피안은 인간의식속의 영원이며 차안은 인간의식속의 시간이다. 영원히 사느냐 시간에 사느냐가 문제다.

인간의 발전과 인류의 평화는 법율의 조문보다도, 국제조약보다도, 수다한 경율론보다도, 인간의 가장 심오한 양심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모든 경율론도 역시 성현의 양심의 소리다. 이 양심이 없을 때 망심 이 자유를 얻어 모든 죄과를 범하게 되고 이 양심이 자유로울때 망심은 제어되어 인간은 향상되고 행복하여 진다.

정진에 네가지가 있으니 생하지않은 악은 생하지 못하게 하고 이미 생한 악은 속히 제멸하며 생 하지 않은 선은 속히 생 하게 하고 이미 생 한 선은 이것을 증장케 함이라.

게을한 중생의 닦는 사업 의 공력 은 미소하여서 오직 물방울이 바다에 이르지 못함과 같다.

‘종조법설집 p81-87 제3절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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