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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티벳의 무종파운동 잠괸 콩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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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7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12-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인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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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교수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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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12-08 10:36 조회 1,8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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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티벳의 무종파운동 잠괸 콩툴

인류의 역사를 통해 정치권에 무정부주의 운동이 있는 것처럼 종교도 무종파 운동이 늘 존재해왔다. 종교는 창조신화나 이에 버금가는 이론이 있게 마련이고 우주와 생명을 아우르는 보편적 진리를 생각하면 종교에 종파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차별심이 만들어내는 사고의 산물일 것이다. 인도불교를 포함해 티벳불교사에도 무종파의 원칙을 주장하던 스승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무종파 운동을 현실세계에서 주도하는 것은 적지 않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근대 티벳불교사의 인물인 잠괸 콩툴(Jamgön Kongtrül, 1813 – 1899)은 본래 ‘잠괸 콩툴 로되 타예’로 불교학자이자 시인, 예술가, 의사, 나아가 닝마빠의 전통에서 숨겨진 경전을 발굴하는 매장사이기도 하였다. 불교학자치고 매우 박식하며 다재다능하였다. 특히 닝마와 까규의 전통에서 활약하였으며 무려 90권에 이르는 불교의 저작을 남겼는데 특히 그의 역작인 <지식의 보배>는 불교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잠괸 콩툴은 티벳 동부 캄지역의 롱걉에서 태어났다. 캄지역은 예전 델게왕국이 존재했던 곳으로 티벳대장경 가운데 델케판이 유명할 정도로 불교사원과 연구, 유적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티벳의 전통신앙으로서 무교의 갈래인 뵌교 사제의 환생자로 여겨져 3살 때 뵌교에 출가하였다. 그러나 용둑 푼촉이라는 뵌교 사제에 의해 훗날  빠드마삼바와의 수기를 받아 환생한 보살로 인정되었다.

잠쾬콩툴은 20세가 되어서 그의 탁월한 속성을 알아본 셰첸 원툴(1787-?)이라는 명승에 의해 닝마빠의 세첸사원에 출가하여 본격적인 불교교육을 받았다. 1832년 정식으로 비구계를 받은 이후에는 뻴뿡지역의 까르마까규 사원으로 옮겨 수학을 계속하였다. 사원의 활불인 까르마 떽촉 뗀뻴은 수계를 다시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다양한 불교의 분야를 섭렵했는데 현교와 밀교, 의학, 건축, 시, 산스끄리뜨 등을 망라한 것이었다. 30세가 되어서 그는 티벳불교의 종파를 가리지 않고 무려 60인이 넘는 스승과 아사리들로부터 가르침과 관정을 받았다. 그러나 잠괸 콩툴이 집중했던 것은 까규와 닝마빠의 전통이었고 주로 마하무드라와 족첸 수행에 전념하였고, 또한 조낭빠의 깔라챠끄라딴뜨라 전통을 전수받아 공부하고 가르쳤다. 그는 캄을 포함해 동부티벳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고, 종교분야 뿐만 아니라 지역의 정치 행정과 외교에도 관여하였다. 

잠괸콩툴이 속한 자신의 전속 수도처는 꾼상 데첸 외쎌 링으로 폐사지경에 이른 것을 다시 세웠다. 안정된 환경속에 잠괸 콩툴은 유명한 저작을 다섯 작품을 남기는데 주로 ‘다섯 보전’이라 알려져 있다. 이들은 현재 모두 영역될 정도로 그 가치가 뛰어나다. 또한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아 도서관을 신축해 확장하였고 불교교학을 전반적으로 집대성 하였다.  



잠괸 콩툴은 특히 티벳에서 사라졌거나 절멸해가는 샤꺄와 까규, 닝마의 전통들을 수집하고, 번역하고 되살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종파는 티벳어로 ‘릭메(rig me)’라고 말한다. 그의 종파를 초월한 불교 전통의 노력은 당대에 그를  ‘무종파의 스승’으로 부르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는 모든 불교의 전통과 종파의 가치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보존에 힘썼기 때문이다. 잠괸콩툴은 두 번째 수도원을 건설하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면서 불교연구에 힘썼고 그의 전기는 그가 여행한 지역들을 기록해 두었지만 티벳 동부지역의 지역분쟁과 이에 개입한 청조와의 갈등으로 전란을 겪기도 했고, 87세 입적했다. 그의 제자인 네쌀 따시 최펠이 전기를 기록하고 이후 여러 대의 활불이 전생했으나, 잠괸 콩툴이 이루었던 저작이나 학문, 수행은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잠쾬 콩툴이 학문과 수행을 겸비할 수 있었던 것은 티벳불교의 전통대로 현교와 밀교를 고루 섭렵했기 때문이며, 오직 법만을 진리의 등불로 삼으라는 석존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계학의 삶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삼학의 전통과 그가 추구한 종교, 예술, 문학, 과학 등에 대한 다양한 섭렵은 인간 이해의 기초위에 종교의 지혜도 더욱 빛이 남을 보여준다. 이것이 잠괸 콩툴로 하여금 티벳불교사에 있어 그가 무종파주의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되게 한 배경이 되었다. 불교에 대해 경전과 종학에 대한 섭렵과 분류는 중국불교의 경우 교상판석이라 이름한다. 이것은 학문적 영역의 소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황실과 지역사회와 엮여 적지 않은 갈등을 유발한다. 신라의 원효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일찍이 화쟁(和諍)과 회쟁(迴諍)의 이론을 폈다. 잠괸 콩툴이 보였던 것으로  어느 종파의 우위를 강조하기 보다 인간사고의 다양성을 섭렵하고 관조하는 자세가 훗날 고정관념이나 사고의 오류를 피하는 인류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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