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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천도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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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92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7-07-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특집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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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중앙교육원장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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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13 07:08 조회 1,9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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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천도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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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 정사
중앙교육원장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영원불멸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는 않으나 업력을 안고 가는 주체는 인정한다. 즉, 영혼이라는고 정불변의 실체는 없지만 업을 짓고 업력을 저장하며 그 과보를 받는 주 체는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라 수시로 변하며 거기에 따른 업력으로써 모습을 달리하여 나타난다. 그 주체를 불교에서는 ‘아뢰야식’이라고 하는데, 편의상 영가 혹은 영식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영가 혹은 영식을 천도한다 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생자필멸, 회자정리, 태어나면 반드시 죽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며 또한 윤회의 법칙이기도 하다. 그러면 죽은 후에는 과연 어떻게 될까? 그리고 영혼과 내세는 정말 있는가? 있다면 어떤 형태를 띠게 될까? 등등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불교는 여기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하고 있다. 즉, 영식이라는 것은 틀림 없이 존재하는 것이며 그 영식에 의하여 내세가 결정되고 영식이 지은 업력에 따라 내세의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을 색 · 수 · 상 ·  행 · 식의 오온이 화합된 것으로 본다. 즉, 우리의 몸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결합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결합된 것은 끊임없이 변화 한다. 제행무상이기 때문이다. 나고 죽고 병들고 늙는 그 모든 것이 변화의 과정이다. 객관계의 물질도 마찬가지로 만들어지고, 얼마간 지속되다가, 파괴되어 없어지는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모든 색계는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천의 원인은 여러가지 인연들이 모여서 성립되기 때문인데 이를 인연화합 또는 연기라고 한다.

우리의 몸은 지 · 수 · 화 · 풍의 사대를 바탕으로 영식이 인연에 따라 결합되어 유형화된 것이다. 지 ·  수 ·  화 · 풍의 사대 자체는 본질상 변함이 없지만 일단 유형화되면, 즉 육체의 형태를 지니게 되면 생 · 노 ·  병 · 사의 변천이 불가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천과 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식이다.

우리의 식에는 안 ·  이 · 비 ·  설 · 신의 5식과 현재의 사실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의식, 그리고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며 온갖 번뇌 망상을 일으키는 제7식인 말라식이 있으며, 우리의 업장을 보존하여 다음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아뢰야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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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뢰야식, 윤회의 원동력

이 아뢰야식은 이 생에서의 우리의 모든 행위, 즉 신 · 구 · 의의 삼업을 빠짐없이 보존하고 있다가 내세의 삶을 결정하게 되고 거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아뢰야식의 작용 중 무엇보다도 중요 한 것은 이것이 여타의 식에 영향을 끼침으로서 현재 우리의 육체와 정신계를 활동하도록 하고, 또 살도록 유지시키면서 모든 선악의 행동을 나타나게 하는 생명의 주체라는 점이다. 우리의 죽음이라는 것은 이 아뢰이식이 우리의 육체를 완전히 떠났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부파불교의 학설에 의하면 인간이 사망한 후 다음 생을 얻기까지의 영식을 중유, 혹은 중음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중음천에 떠도는 불쌍한 영식” 이라고 할 때의 중음이 바로 이것이다. 이 중음천에서는 영식이 다음에 태어날 곳을 찾아 헤메고 다니는데 중유가 평소에 선업을 많이 쌓았으면 흰 빛깔이 많으며 죄를 많이 지었으면 검은 빛을 띠게 된다고 한다.

또한 악업을 많이 지은 중유는 좌 우로는 보지 못하고 아래쪽만 볼 수 있으며 반대로 위쪽만 보고 다니는 중유가 있는데 이는 선업을 많이 행한 영식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아래 쪽만을 보고 다니는 중유는 지옥에 태어날 확률이 높고 위쪽만 보고 다니는 중유는 천상에 태어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또한 이 중음천에서는 업력이 같은 중유끼리는 서로 친하고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악업의 중유는 악업끼리 선업의 중유는 선업끼리 서로 끌어당 긴다고 한다. 우리가 돌아가신 분의 영식왕생뿐만 아니라 모든 유연영식의 왕생성불을 기원하는 것도 선한 영식끼리 서로 끌어당기도록 도와주 는 것이 된다.

아뢰야식에 보존된 업력은 중유를 인도하는 원동력이 되는데 가령 악업이 많은 중유가 미래의 출생처를 찾을 때 악업의 힘이 중유의 지혜로운 판단을 흐리게 하고 또 착각을 일으키게 하여 지옥과 축생, 아귀와 같은 삼악도를 극락세계와 같은 낙원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악 업이 많은 중생은 스스로 달려가서 태어나게 되는데, 태어나자마자 그곳에서 가하는 고통을 업보로 받게 되며, 반대로 선업을 많이 닦은 영식은 지옥과 극락 등 미래의 세계를 올바 르게 판단하여 태어나도록 그 선업이 안내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악업은 무지를 나타내고 선업은 지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평소에 수행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 서이다.

학설에 의하면 인간이 사망할 때 선업이나 악업 가운데 어느 한쪽이 아주 강하게 나타나면 지옥 또는 천상계에 즉시 가서 출생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선업과 악 업이 혼합되어 아뢰야식에 보존되어 있으므로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다음 생을 받게 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기간이 걸리는데 그 기간이 7일 내지 49일이 된다고 한다. 물론 49일이 훨 씬 지나서도 태어날 곳을 찾지 못하고 중음천을 떠도는 영식도 있지만 대체로는 이 기간 안에 다음 생이 결정되기 때문에 사십구재를 올려 영식천도를 기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평소에 자신의 몸에 대한 애착은 물론 재산과 처자권속 그리고 명예 등에 대한 애착으로 뭉쳐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은 영식도 이러한 애착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이다. 애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다음 생을 받지 못하고 중음천에 떠도는 기간이 길어지게 된다. 이것은 살아있는 우리가 망자에 대하여 가지는 애착과 더불어 망자 자신의 영식도생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해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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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 끊고 지혜심 

발현케미륵보살의 <유가사지론>에 의하면 인간이 사망할 때에는 혼란한 생각이 계속 나타나는 가운데 서도 장시간 익히고 습관을 들였던 자신에. 대한 애착이 더욱 나타난다고 했다. 이는 곳 무지와 번뇌의 현상으로서 내생의 길을 가는데 커다란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불교에서는 이러한 영식의 애착을 제거하고 영식으로 하여금 지혜로운 판단을 하게 있기 때문이다.

하여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천도 불공을 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러 불보살의 가피력과 원력을 통하여 무지한 영식을 깨우쳐 살아 생전 자기에게 가졌던 부질없는 집착과 망상을 떨쳐버리고 무상한 진리를 간직하고 깨달음으로서 바른 길을 따라 왕생성불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는 데에 천도 불공의 의의가 있 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인간을 제도하고 교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후의 영식을 교화하여 천도하는 것도 중요하 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이유의 인간만을 생각하고 몸을 벗어 보이지 않는 무상의 영식은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사후의 영식도 오직 형체만 없을 따름이지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우리와 꼭 같다고 한다.

한 집안에 어른이 아파 누워 계시거나 탈선한 자녀가 있으면 집안 식구들의 마음이 편하지 못하듯이 선망 부모나 일가친척 선대의 조상 가운데 누군가가 삼악도에 떨어져 한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 가족의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할지라도 고통 받는 영식은 항상 이승의 가족이나 친척이 구원의 손길을 뻗어 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비록 우리 중생의 삶이 자업자득이라 영식이 고통 받는 것도 스스로 지어서 그런 것이나 우리가 지성으로 불공하고 왕생성불을 기원하면 부처님의 위신력과 불보살의 한량없는 대비심의 가피로 영식이 천도될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의 복업과 공덕도 한량없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선망 부모가 저지른 죄업의 대부분이 자식 들을 위한 애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살아 생전의 효도는 물론 당연한 것이나 돌아가신 뒤에도 천도불공을 통하여 극락 왕생의 길로 인도해 드리는 것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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