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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행자의 가족을 찾아서 - 부평 시법사 이정숙 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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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90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7-05-01 신문면수 12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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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07 09:18 조회 1,94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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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행자의 가족을 찾아서 - 부평 시법사 이정숙 교도
"마음 묶어 놓을 곳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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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부산의 한 시장터 동네 어귀.

“야, 니가 얼마나 잘났어?” “그래, 잘났다, 왜 어쩔건데?”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이던 시절이어서 남은 커녕 자기도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 였을까. 사람들의 언행은 거칠기 짝이 없었고, 이기적이기만 했다. 신접살림을 살던 새댁은 자기를 잃어 버리고 어리석음에 떨어져 아둥 바둥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새댁은 세파에 따라 요동치는 내 마음을 묶어 놓을 곳을 찾 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부평 시법사 신도회장 선효인(이정 숙. 71) 보살의 입교동기는 그렇게 남 달랐다. 대개 구병을 위해, 당장의 소원성취를 위해 종교에 입문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효인 보살은 오로지 마음을 닦아 보겠는 의지에서 서원당을 찾았다.

“산중 깊이 은거하고 있는 절이 아니고 생활속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여러 말씀 중에서 ‘사대 육신이 허망해서 집착할 바가 못된다’ 는〈무상계〉가 마음에 와 닿았어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지수화풍으로 돌아 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알고서 수행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산 수정동 범석심인당에서 처음수행을 시작했을 때에는 새벽별을 보고 일어나 항송을 시작해서는 저녁별을 보고서야 마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보통 새벽 4시면 저절로 눈이 떠졌는데 혹 못 일어나는 경우엔 마치 신중님이 그러시는 듯 누가 뒷통수를 '탁’ 쳐서 깨우기도 했단다.

진언수행을 한지 40여 성상이 흐르는 동안 선효인 보살과 가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남편 윤환섭(74)각자는 수행이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사업일로 바쁘고 무절제했던 생활도 바뀌고, 수행에 있어서도 더없이 좋은 도반 역할을 하게 됐다. 슬하의 세 딸은 독실한 진언행자가 되었고, 외손자 들도 모두 절에 다닌다.

“7살난 손주가 염주를 쥐고 진언하는 것을 보는 것이 낙입니다. 식구들 이제 수행을 이해하고 열심히 도와주는 것이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어요”

선효인 보살에게도 인생의 고비가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은 부산에서 하던 사업장에 큰 화재가 났다. 사고 수습 후에 남은 것은 재봉틀과 작은 고리짝뿐.

“그렇게 암담했을 때 각자님에게는 한 마디만 말했죠. 이렇게 됐어도 종지는 변함이 없고, 신앙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각자님은 이해와 위로를 해 주더군요. 얼마나 고마웠는지..”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상경을 해서는 인천 송현동 심인당을 찾았다. 그 후 서울 월곡동, 보문동, 서대문 등지의 서원당과 관성사, 지인사, 총지사 등을 다니며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지금 다니는 시법사의 전신은 근처 상가건물에서 ’88년도에 개원한 정혜 서원당. 선효인 보살은 허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새벽 서너시에 절을 찾아 불철주야로 진언수행을 해나갔다. 운신이 힘들 정도로 쇠약해 졌을 적엔 부 의금을 놓고 가는 도반들도 있었다고. 보살은 그런 몸을 이끌고 부평에서 서 울 총지사를 오가며 수행에 전념했다. 너무 기력이 없을 때엔 아예 절에서 49일을 숙식하며 불공을 했다. 이런 모습을 가상히 여기셨는지 당시 본산에 계셨던 원정 종조님께서 불러 말하셨다.

“걱정 말아라. 명두고 안 죽는다. 그건 그렇고, 이 집 크기를 알려하면 어째야 하느냐?”

선효인 보살이 얼결에 말했다.

“바깥을 뺑뺑 돌아 봐야죠”

“그래, 그러면 내부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지?”

“그야 안에 들어와 잘 살펴 보면 되지 않겠어요?”

“아, 그래? 그라믄 됐다”

선효인 보살은 종단 최고 어른의 갑작스런 말씀에 당황해 대답은 했지만 걱정스런 마음에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바깥을 살피고, 안을 보려면? 왜 그런 말씀을 내리셨을까...’ 그게 화두가 돼 며칠이 흘렀다.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종조님은 평소 형형한 눈빛으로 질문 세가지만 하시고는 이내 책상에 돌아 앉으셨죠. 시간을 아끼신 거죠.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삼업 소멸과 보시하고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닦는 육바라밀행을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새벽불공을 하면 교화 안되는 일 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선효인 보살은 창종 초기 훌륭한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신행해 온 것을 더 없는 복이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현 종단과 스승님들에게는 가정 불공과 가족제도에 좀 더 힘을 쏟아줄 것을 당부한다. “예전 스승님들은 가정불공과 개인상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 같습니다. 가족제도에도 힘을 보태주셨구요. 종단에서도 가족제도를 하는 교도에게 인센티브를 줘서 활성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신앙을 보고 자란 딸(윤혜신. 43)이 말했다.

“총지종의 미래를 위해 가족제도와 함께 어린이 청소년 포교에도 투자가 있어야 해요"

딸 혜신씨는 잘 다니던 유치원 교사직을 그만두고 총지종 한마음 유치원으로 옮겨 종단발전에 헌신했던 어린이 포교 베테랑이기도 하다. 중학생, 고등학생 두 아들을 둔 혜신씨는 그만큼 절박하다. 두 아들을 서원당에 앉혀 놓는 데까지는 하는데 막상 아이들만 덩그러니 앉아 불공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안타깝다고.

혜신씨는 아이들의 근기에 맞는 포교 프로그램과 어린이 청소년 학교, 수련회 운영에 필요한 지원이 우선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불공이 인생의 전부인 것 같은 어머니를 보며 자랐어요.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처럼 신앙을 하다면 적어도 그른 삶을 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께 말씀 드리고 같이 불공을 하기 시작했죠”

혜신씨는 그렇게 어머니를 본받아 이제는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진언행자가 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두 아들에게 그런 모범을 보이진 못한다고. 그걸 종단이 나서서 해줘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불공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 선효인 보살은 꿈속에서도 육자주를 놓지 않는다고 한다. 체중 38kg으로 오가는 것이 어려워 절에 살다시피 하며 자성을 밝히고 싶어 하던 수행인. 아주 오래 전 ‘내 마음을 묶어 놓을 곳을 찾아야 한다’ 며 서슬 푸르던 새댁의 숙제는 풀렸을까.  윤우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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