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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 수행: 사념처는 일체법을 총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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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54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2-09-05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불교의 선정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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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정사 필자정보 중앙교육원장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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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6 06:36 조회 2,64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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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불교의 선정 (11회)

사념처 수행: 사념처는 일체법을 총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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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 수행을 통해서만 우리는 마음을 다스 릴 수 있고 세간의 모든 탐욕과 번뇌를 제거할 수 있으며 염력에 상응하는 정견과 정지를 얻 을 수 있고 생노병사와 그에 따른 모든 고통에 서 해탈할 수 있다. 사념처의 관찰 대상인 신( 身), 수(受), 심(心), 법(法)은 불교 교법의 모 든 면을 포함하기 때문에 사념처를 일러 ‘일체 법’이라고도 한다. 불교 교리 가운데의 오온, 십 이처, 십팔계, 십이연기, 사성제 등의 교법은 모 두 사념처의 시각에서 해설을 더한 것이다. 그 렇지만 사념처가 일체법이라고 해서 다른 교법 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념처 가 제법의 핵심 강령이고 일체법은 모두 사념처 를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념처가 제법의 종합 이고 총결이라는 의미이다. 사념처의 수행은 종합적이고 전면적이기 때 문에 아주 완전한 수행법이다. 사념처 수행을  통하여 심신의 고통을 가라앉히고 정법의 즐거 움을 누릴 수 있으며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탐욕, 진에, 혼침수면, 악작도거, 의(疑) 등의 오 개(五蓋)를 제거하여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내 고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지혜를 얻는 다는 것은 일체의 무명번뇌를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 서 《아함경》에서는 사념처 수행을 ‘불좌(佛 座)’에 비유했다. 사념처 수행은 초심자 뿐만 아니라 과거, 현 재, 미래의 삼세제불이 다 의지하여 열반을 얻 으며 모든 아라한들이 항상 사념처 수행을 하 여 누진과 열반을 얻는다고 경전에서는 설하고 있다. 그 밖에 사념처는 하루 24시간 가운데의 행,주,좌,와,어,묵,동,정의 모든 과정 가운데에 서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문으로서 무슨 일을 하던지 항상 각성하여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불교의 최고 수행법이다. 사념처 수행을 통하여 우리가 우선 해야 되는 것은 우리의 네 가지 전도망상을 바로잡는 일이 다. 전도망상이란 글자 그대로 거꾸로 된 우리 의 잘못된 관념을 말한다. 그것에 네 가지가 있 으므로 사전도(四顚倒)라고 한다. 사전도는 사 도(四倒), 혹은 사도견(四倒見)이라고도 하는 데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들이 네 가지의 잘못 된 망견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우리 중생들은 모두 하나의 ‘나[我]'가 있다 고 집착하여 ‘자아’라는 관념이 생기고 이 자아 는 불변의 것이며[常], 즐거운 것이고[樂],  깨 끗한 것[淨]이라는 망견을 내게 된다. 더욱 자

세하게 말하면 사전도는 중생들이 몸을 깨끗한 것이라고 집착하고 오관으로 받아들이는 느낌 을 즐거운 것이라 집착하고 항상 변하는 마음을 항상 그대로인 것처럼 집착하고 모든 사물과 현 상(자기 자신을 포함하여)을 보고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세상 만물의 실상은 무상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모르 고 언제나 그렇게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다. 그래서 곧 죽을 목숨인줄도 모르고 아까워 서 벌벌 떨기도 하고 권력에 탐착하기도 한다. 생노병사를 통한 괴로움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 과 이별하는 고통,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 한 데서 오는 괴로움 등등을 보면서도 무상이 란 것을 깨치지 못하고, 영원한 것처럼 추구하 는 모든 것이 실은 괴로움의 씨앗이 된다는 것 을 모르고 악업만 쌓고 있는 것이 우리 중생들 의 전도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망견으로 인한 사전도의 상· 락·아·정을 사념처를 통하여 바로잡게 될 때

에 그것을 열반의 사덕(四德)이라고 한다. 즉 열반을 통하여 얻게 되는 상·락·아·정은 변 하지 않는 진정한 상·락·아·정이 된다. 항 상 불변하는 무생멸의 상(常)을 상덕(常德)이 라고 하며, 모든 괴로움이 멸하여 영원히 적멸 안락을 누리는 것을 낙덕(樂德)이라고 하고, 자 유자재하게 되어 스스로 주인이 되어 그 성품 이 변하지 않는 것을 아덕(我德)이라고 하며, 일체의 더러움을 해탈한 것을 정덕(淨德)이라 고 한다. 같은 상·락·아·정이지만 나라는 것에 집착하여 빚어지는 상·락·아·정은 영 원한 것이 아니지만 사념처 수행을 통해 얻어 지는 상·락·아·정은 불변의 사덕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념처 수행은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의 네 가지 처소에서 일어나는 망 견인 상·락·아·정의 전도된 마음을 바로 잡 는 수행으로서 이를 통하여 부정, 고, 무상, 무 아의 정념을 일으키고 바른 지혜를 지니게 되 는 것이다. 몸의 부정과 느낌의 괴로움, 마음의 무상, 법의 무아를 관찰하는 것이 사념처 수행 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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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 수행을 신수심법에 따라 다시 자세하 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념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의 몸 은 과연 깨끗한 것인가? 아무리 몸을 치장하고 이쁘게 꾸며도 우리 몸의 아홉 구멍으로 흘러나 오는 더러운 것은 피할 수 없다. 더구나 목숨이 끊어진 시체는 설혹 그것이 절세미인의 것이라 고 해도 아무도 쳐다보려하지 않을 것이다. 이 처럼 몸의 더러움을 관하여 살피는 것이 사념처 가운데의 신념처이다. 수념처 수행에서 ‘수(受)’라는 것은 바깥으로 부터 받아들이는 감수작용인데 우리가 바깥 경 계와 접촉할 때는 반드시 싫은 느낌[고], 즐거 운 느낌[낙], 싫지도 좋지도 않은 느낌[사(舍) 이 있다. 이러한 것을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괴 로운 느낌은 당연히 괴로운 느낌이지만 즐거운 느낌도 마찬가지로 괴로움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무상이므로 즐거움도 다할 때가 있 고 즐거움이 끝날 때는 오히려 괴로움이 더 크 기 때문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즐거움이 항상 그대로 머무는 것처럼 집착하는 것이 전도된 낙 이며 이러한 느낌을 관찰하여 괴로움인 것으로 바로 아는 것이 수념처의 수행이다. 심념처는 마음을 관찰하여 무상한 것임을 아 는 수행이다. 마음은 생명의 본질이고 모든 중 생의 삶을 이끌어 가는 중심체이지만 고정불변 의 것이 아니고 인연화합으로 생기는 것으로서 순간순간 생멸하며 이어져서 찰나도 머무르는 법이 없다. 이러한 것을 관찰하여 무상이라는 것을 아는 혜력을 기르고 마음이 변하지 않는 상(常)이라고 잘못 아는 전도망상을 타파하는 것이 심념처의 수행목적이다. 법념처는 우주 만법이 모두 인연으로 생긴 것 으로서 고정불변의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관 찰하는 것이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아’라는 것 은 실은 가아(假我)이다. 이것을 어리석은 중 생들은 진아(眞我)로 생각하고 온갖 망견과 집 착을 일으킨다. 이러한 가아에 대한 잘못된 생 각과 집착 또한 온갖 괴로움을 낳는 원인이 된 다. 이런 것을 잘 관찰하는 것이 법념처의 수 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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