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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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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64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3-07-02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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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우인 필자소속 개천사 필자호칭 정사 필자정보 대구 개천사 주교 우인 정사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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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31 09:00 조회 1,9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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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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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개천사 주교 우인 정사

보살은 자기 자신이 아픔을 겪을 때 타인의 아픔을 함께 생각하고 또 이웃이 겪는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겨 이 땅에 다시는 아픔이 존재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면 보살이 한번 발심하기만 하면 이후 계속해서 처음 발심했던 마음을 그대로 지켜 나갈 수 있겠습니까?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자신이 고통스러움을 겪을 때 그 고통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발심했다 하더라도 자기 생활이 그 고통에서 조금만 벗어나게 되면 안일 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의 생활입니다.

인간은 동물보다 뛰어난 존재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특별한 존재도 아닙니다.

주어진 생활 속에 쉽게 안주하고 환경이 바뀌면 그에 따라 마음도 변하게 마련인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한번 발심한 그 뜻으로 성불할 때까지 보살행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참회와 자기 성찰이 요구 됩니다. 그래서 보살은 개인 관계에서든 사회적 차원에서든 이타행을 하는 과정에서도 내가 남을 위하니까 훌륭하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지낼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보살은 무엇보다도 겸손 해야 합니다. 명심보감에 태공왈 물이자대이멸소 하고 물이시용이경적 이니라 나를 귀하게 여김으로서 남을 천하게 여기지 말 것이며 나를 크다고 여겨 남의 작음을 멸시하지 말 것이며 나의 용기를 믿고 적을 가볍게 보지 말라 그래서 매사에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겸손하지 않으면 한 순간에 아상을 갖게 되고 그 아상 때문에 중생을 구제하기는커녕 자신과 주변의 많은 사람들까지 고통에 빠트리게 됩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장율사는 신라시대의 스님으로서 당나라에서 수행할 때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마정수기를 받게 됩니다. 신라시대 불교계율의 시초를 마련하고 불법의 일대부흥을 일으켜서 최고 승직인 승통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 친견시 제가 열반에 들기 전에 한번만 더 보살님을 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는 청을 드립니다. 이에 문수보살은 태백산에서 다시 만나자 고 약속합니다.

그래서 자장은 노후에 직위에서 물러난 후 태백산에 있는 정암사 뒤편에 기도처를 마련하여 시자 한사람만 데리고 기도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산속에 칡넝쿨로 토굴을 지어놓고 백일기도를 올렸습니다. 백일째가 가까워 올수록 기도의 정성은 더욱 극진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다 떨어진 허름한 옷을 입고 망태기만 하나 걸친 거지행색의 사람이 움막집 앞에서 자장 있느냐 고 외치는 겁니다. 시자가 나와 보니 아주 불결한 차림에다 죽은 개가 들어있어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망태기를 걸치고서 함부로 자장의 이름을 불러대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마치 신성한 기도 도량을 비웃기라도 하듯 악취가 풍기는 죽은 개를 메고서 임금님도 엎드려서 절을 할 만큼 귀하신 자장율사를 멋대로 불러대니 시자가 응해주지

않았습니다.

왜 찾느냐고 시자가 묻자 너는 알바 아니다 자장을 좀 보자고 하며 버티고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자는 할 수 없이 토굴 안으로 들어가서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정진의 도가 점점 깊어지고 기도는 점점 무아지경에 도달하는 차에 이상한 자가 찾아와 방해를 한다 싶어 돌려보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그 거지는 돌아가리다 돌아가리다 아상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보겠는가 하면서 망태기를 탁 터는 순간 그 안에 들어있던 죽은 개는 사자좌가 되고 그 위에 가볍게 올라타고 구름저편으로 날아가는데 바로 그분이 문수보살 이었습니다. 기도하던 자장율사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뛰어나오니 이미 문수보살은 저 동쪽 하늘가로 날아간 후였습니다. 사라져가는 문수보살을 바라보며 아가다가 자장율사는 그만 입적을 합니다. 여기서 예를 든 것은 자장율사를 낮추어 보아서가 아니라 그처럼 도력이 높고 훌륭한 수행자도 한순간 아상에 가리어 진실을 바로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바로 그 순간적인 아상 때문에 보살을 친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보살이라 하여 백의를 걸치고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살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자 천대받는 자의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성불하신 뒤 45년간의 일생을 다 떨어진 옷 한 벌만을 걸치고 다니셨습니다. 마을에 흉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이 기근에 허덕이면 그 분도 함께 굶주렸고 마을 사람들이 말먹이로 허기를 달래면 그분도 함께 말먹이를 드셨습니다. 그러한 분이 부처님이 십니다. 부처가 부처인 것은 금빛 찬란한 옷, 삼십이상 팔십종호라는 찬란한 몸매, 타고난 웅변과 위엄 때문이 아닙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중생과 함께하고 중생 스스루가 성불할 수 있는 길을 열어 가셨기에 부처님이 십니다. 소위 자장율사 같은 분도 아상을 버리기 어려운데 하물며 어떻게 우리 같은 중생이 쉽게 아상을 버릴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상은 무지몽매하다는 민중들 보다 수행자나 도인 지식인등 소위 지각 있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많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보살의 길을 가는 사람들 에 관한 구절이 나옵니다. 보살은 마땅히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러나 만약 보살마음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이미 보살이 아니라고 한 뜻은 우리가 갖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이기심을 버리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온전한 보살행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행에 필요한 것은 어떤 형식이 아니라 잘못된 것과 단절하는 단호한 마음과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그리고 너희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 하라 비굴해서도 안 되고 교만해서도 안됩니다. 바로 당당히되 겸손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당당 하라는 것은 내 주체를 상실하지 말라는 말씀이며 겸손해야 함은 타인의 당당함 그 주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올바로 발심하여 자기 삶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채도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지 않으면 보살행을 정진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보살은 어떤 특별하게 화려한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아상에 가리워져 있을 때 바로 그 상을 깨우쳐주는 계기로 다가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발심하는 것도 중요하며 또 수행을 해 나갈 때 자신을 되돌아 봄도 아주 중요합니다. 보다 나은 사회 밝고 명랑한 사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보다 깊이 생각해 보고 반성하고 참회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고민들 중에 상당 부분은 어떤 면에서 필요 없는 고민일수 있습니다. 현재의 자기 인생에서 추구하는 이기심은 자주적인 인간이 되는 삶에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우리들 스스로 인간을 평등하게 보려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점이 있다면, 나의 이익과는 관계없이 시정되어야 옳다고 판단되는 일이라면 그 생각대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자기감정과 이기심을 버리지 않으면 그 어떠한 곳에서든 효과적인 성과를 거두기란 어려운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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