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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낭자의 끝없는 사랑이 머문 또 하나의 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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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47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2-02-02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산신각 탐방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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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종열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서산 도비산 부석사 김종열 기자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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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6 12:45 조회 2,5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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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낭자의 끝없는 사랑이 머문 또 하나의 부석사
용왕과 산신 그리고 선묘낭자를 모신 도비산 부석사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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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낭자의 전설이 머문 바위 부석


한국불교의 화엄종찰인 영주 부석사는 무량수전과 안양루에 서 내려다본 소백산맥의 아름다움으로 불자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 중국에서 유학한 의상 대사가 신라통일기인 676년 세운 고 찰 로 ‘우리나라 10대 사찰’중하나이다.

부석사에는 의상 대사와 중국 여인 선묘 낭자에 얽힌 애틋한 러브 스토리가 유명하다.

선묘는 당나라로 유학 온 의상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불법 을 공부하는 의상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 의상은 선묘의 사랑을 거부하고 공부를 마친 후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탄다.

이때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고, 의상 대사가 험한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나올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이 지역에 있던 500여명 의 유민이 절 창건을 방해하자, 용이 된 선묘가 커다란 너럭바위 를 들어 올려 유민을 물리치고 절 창건을 도왔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왼편 뒤쪽에는 당시 선묘가 유민 무리를 물 리치기 위해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는 너럭바위가 전설처럼 남 아있다. 여기 또 다른 부석사에도 선묘낭자의 설화가 있다.

서산 도비산자락의 부석사에도 똑같은 설화가 있다. 다만 선 묘낭자가 부석사 앞 바다에 바위로 변해 부석사를 지킨다는 점 이 다르다.

창건 연대는 677년으로 영주 부석사 보다는 한해가 늦다. 서산 앞바다 천수만을 바라보는 부석사가의 중국을 마주보고 있다는 점에서 설화의 사실성은 더욱 커진다.

만조 시에는 물에 잠기고, 간조 시에는 물위에 뜬 바위처럼 보 였다는 부석의 존재는 아쉽게도 지금은 매립으로 확인 할 수는 없었다.

 


경허, 만공 대선사의 정진도량 부석사


조선시대 무학스님이 중창하고, 근대에는 한국선불교를 중흥 시킨 경허, 만공 대선사들께서 이곳에서 수행정진 하였다.

인중지룡을 길러내는 곳이라는 ‘목룡장’과 지혜의 검을 찾는 곳이라는 ‘심검당’ 현판은 경허스님 의 글씨이다.

부석사 큰방에 걸려있는 ‘부석사’ 현판은 만공스님께서 70세에 쓴 글이다. 큰 법 당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는 목룡장 과 심검당 큰방은 누워있는 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 그래서심검당 아래의 약수는 우유약 수라 부른다. 법당 옆의 큰 바위는 소뿔의 형상 을 하고소 법당 건너편 개울 아래에는 소가 마실 물이 흐르는 구수통(여물통)이 있는데, 이 구 수통에 물이 계속 넘치면' 부석사에서는 먹거 리 걱정이 없다고 전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 100여 년 전에 부석 사 약수가 끊어져 이상하게 여겨 스님들과 마 을사람들이 부석 (검은여)에 가보니 누군가 몰 래 무덤을 썼기에 주인을 찾아 무덤을 이장하 고 나니 다시 약수가 솟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석사와 부석 (검은여)간에 신령스 러운 기운이 통하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극락전 아래에는 안양루가 있다. 극 락전이 부처님의 집이라면 안양루는 극락세쳬 대중들의 머무는 곳이 다.

법당 좌측으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산신각이 있다. 산신 각에는 중앙에 산신, 우측에 선묘낭자. 좌측에 용왕을 모셨다.

산신은 백발 수염에 호랑이를 타고 있는 전형적인 산신의 모 습이다. 선묘낭자는 입상으로 모셨는데, 영주 부석사의 탱화에 서 보여지는 선묘의 모습과는 달리 작고 아담한 동자녀의 모습 이다.

서해 바다를 바라보는 지리적 위치로 용왕을 모신듯한데 용왕 은산신각의 좌측으로 돌아가면 산신각이 올라가도 남을 만큼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거북바위다.

어떤 분들은 이 바위가 부석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내기도 하는데 우리 부석사의 부석은 분명히 바다위에 있다.

하지만 혹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어도 좋을 것 같다.

용 두 마리를 등에진 의자에 앉아 제관들의 호위를 받는 모습 이다.

역시 거북이의 모습을 한 별주부가 보인다.

산지 사원의 경우에는 삼성각이란 이름으로 산신, 칠성, 독성 을 모시는데 반하여 이곳은 전면 3칸짜리 하나의 전각에 각 칸 마다 좌측으로부터 용왕각, 산신각, 선묘각의 현판을 따로 따로 걸었다.



불교문화의 정수를 간직한 서산


서산은 백제시대부터 중국과의 해상 교통이 발달한 요지였다. 중국의 산둥 반도를 떠난 배들은 지금의 서산이나 당진으로 들 어왔다. 그만큼 중국의 선진문물이 빨리 당도하는 곳이었다.

물론 당시 중국의 불교문화가 가장 먼저 전해진 곳도 이곳이 었을 것이다. 서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백제 후기에 조성된 용 현면 마애삼존불을 들 수 있다.

국보 84호로 지정된 이 마애불은 '백제의 미소’로 불리워지며 온화한 한국 불상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가 문화재청장 재직 시절 마애불을 감싸고 있던 보호각을 철거 하였다.보호각이 있 을 때는 인공적인 빛에 의존해 불상의 미소를 친견했지만 지금 은 아침부터 해질 녁까지 자연의 빛으로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이외에도 간월도 간월암에서 바라보는 낙조도 이곳을 방문했 을 때 반드시 들러 보아야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처음 부석사를 만난 것은 기자가 대학을 다닐 때 였다.

일학년 추계답사로 영주 부석사를 찾았다. 지금은 잘 정비된 진 입로를 따라 사찰로 올라가지만 그때만 해도 비포장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사과나무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경사진 도로를 따라 안양 루에 올라, 굽이굽이 펼쳐진 소백산맥의 장엄함에 기자는 그 자리 에서 목석처 럼 굳어버 리고 말았다.

스무 살, 굽이치는 소백산의 아름다운 모습은 힘들고 치칠 때 마 다 내 가슴속에서 위로와 용기를 주는 풍광으로 자리 잡았다.

서산의 부석사를 찾았을 때도 같은 감흥을 받지 않을까 내심 기 대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앞으로 펼쳐진 천수만의 아름다움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의 눈에는 소백산의 굽이치는 산등성 이가 서해의 천수만 앞바다의 파도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뭍으로 오르지 못하는 서해의 용, 선묘낭자를 위해 천수만 앞 도비 산자락에 부석사를 창건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나라에는 같은 이름과 창건 설화를 가진 두 개의 부석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이번 취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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