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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궁궐: 전란을 태비한 완벽한시설 남한산성 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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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56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2-11-07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편집위원회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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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종열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김종열 기자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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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5 05:33 조회 1,78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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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궁궐: 전란을 태비한 완벽한시설 남한산성 행궁

가을이 깊다. 남한산성을 오르는 좁은 2차선 도로의 양옆으로 단풍이 한창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는 느껴지 못한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오늘 온몸으로 느낀다. 지난 4월 호암미술관 취재를 끝으로 한동안 편집위원들이 취재를 나서기가 힘들었다. 상, 하반기 불공과 호국안민기원대법히, 제2회 통일음악예술제까지 쉴 틈 없이 달려왔다. 이제 한 숨 돌리고 가을이 깊어가는 남한산성으로 편집위원들이 다시 모였다. 총지사에 모여 미니버스에 올라, 채 30분도 안되어 남한산성 한 가운데에 당도했다. 이리 가까운 곳에 자연을 한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을 왜 몰랐을까? 오늘은 남한산성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독자들에게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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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을 지키던 최후의 보루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이다. 백제가 한강유역의 한성 백제를 온조왕의 성터라는 전설이 남아있다. 본격적인 성곽은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 축조로부터 시작된다. 조선 인조 2년 1624년에 지금의 형태로 축성을 본격화한다.

《남한지》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가 총융사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였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가 맡았다. 4문과 8암문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와 창고 및 국가의 유사시를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으며, 1626년 7월에 공사를 마쳤다. 이후에도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간 반, 하궐 154간 이었다. 재덕당은 숙종 14년에 세웠고,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전을 세웠다. 그리고 사직단을 옮길 우실도 세웠다. 한마디로 작은 궁궐을 옮겨 놓았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된다. 관아로는 좌승당, 장각, 수어청, 제승헌이 건립되었다. 군사기관으로는 비장청, 교련관청, 기패관청 등을 비롯하여 종각, 마랑, 뇌옥, 등이 들어서 유사시 군 사령부역할을 하였다.



불법과 나라를 같이 지켜낸

승군 최고 사령부


남한산성에는 유사시 나라를 지키는 승군을 총괄하는 승도청이 자리했다. 팔도 승군을 총괄하는 관청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분연히 일어나 창을 드는 성군으로서의 불교도와 스님들의 힘은 대단히 컸다.

남한산성의 축성에도 승려 각성이 도총섭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다. 이들의 승군의 수행과 거처를 위하여 예전부터 있던 망월사, 옥정사 외에 개원, 한흥, 국청, 장경, 천주, 동림, 동단의 일곱 개의 사찰이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고, 나머지는 폐사지로 사적으로 지정 되어 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5영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  은 남장대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수어장대 라고도 함) 하나만이 남아 있다. 수어장대는 높은 섬돌 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개방되어 있다. 성문은 홍예문 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 문루를 올려 세웠는데 매우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남한산성의 축성 완성 된 뒤, 수어사 이시백이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 14년)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으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 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아픈 역사는

되풀이 되수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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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7년 1639년 조선은 청나라외의 전쟁에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는다. 이 전란을 우리는 병자호란이라 부른다. 청은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내고, 그 자리에 새운 비석이 바로 ‘삼전도비’다.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로 이조판서 이경석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 비명은 여이징 이 썼다고 전한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 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석의 한쪽 면에는 한문, 다른 쪽 면에는 만주문, 몽골문으로 번역되어, 하나에 3개국 문자를 사용하였다. 또한 비 머리의 이수, 받침돌의 귀부 조각도 정교하여 미술사적으로는 조선 후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원래는 석촌호수 주변에 세워졌으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1895년(고종 32년) 매몰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에 의해 다시 세워지고, 1956년 문교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1963년에 다시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고증을 거쳐 최초의 위치인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겨졌다.

어떤 나라라 하더라도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 반면, 잊지말아야하는 치욕의 역사도 있기 마련이다. 모두가 우리의 역사이다. 최근 일본이 행하는 영토 분쟁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 인식을 바라볼 때, 역사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고민해 본다.


취재

편집위원 이인성, 박묘정, 박정희, 최영아, 강경민 

통신원 양재범, 이형자, 김옥임 

편집정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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