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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몰이노인과무학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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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39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1-06-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인물 / 설화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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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7 13:22 조회 2,37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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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불교설화 (56회)

소몰이노인과무학대사

조선 건국초. 송도 수창궁에서 등 극한 이성계는 조정 대신들과 천도 를 결정하고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무학대사는 옛 부터 신령스런 산 으로 알려진 계룡산으로 내려가 산 세와 지세를 살폈으나 아무래도 도 읍지로는 적당치 않았다. 발길을 북 으로 옮겨 한양에 도착한 스님은 봉 은사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뚝섬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니 넓은 들이 한눈에 들 어왔다. 사방으로 지세를 자세히 살핀 스 님은 그곳이 바로 새 도읍지라고 생 각했다. 『음, 땅이 넓고 강이 흐르니 과연 새 왕조가 뜻을 펼 만한 길상지로 구나.』 무학대사는 흐뭇한 마음으로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였다. 『이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곡 무학 같구나. 

왜 바른길로 가지 않고 굳 이 굽은 길로 들어서느냐?』 순간 무학대사 의 귀가 번쩍 뜨였 다. 

고개를 들고 돌아보니 길 저쪽 으로 소를 몰고 가 는 한 노인이 채찍 으로 소를 때리며 꾸짖고 있었다. 스님은 얼른 노 인 앞으로 달려갔 다. 『노인장, 지금 소더러 뭐라고 하 셨는지요?』 『미련하기가 꼭 무학 같다고 했 소.』 『그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 지요?』 『아마 요즘 무학이 새 도읍지를 찾아다니는 모양인데, 좋은 곳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니 어 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 소.』 무학대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공손히 합장하고 절을 올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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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서울 왕십리 네거리. 왕십리역은 강북의 동북방향과 선릉/분당을 이어

주는 지하철이 개통 될 예정이다.


『제가 바로 그 미련한 무학이옵니 다.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좋은 도 읍지라고 보았는데 노인장께서 일깨 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더 좋 은 도읍지가 있으면 이 나라 천년대 계를 위하여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 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10리를 더 들어가면 주변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 시오.』 『노인장, 참으로 감사합니다.』 무학대사가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 사를 하는 순간, 노인과 소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스님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북쪽을 향해 10리쯤 걸 었다. 

그때 스님이 당도한 곳이 바 로 지금의 경복궁 근처였다. 『과연 명당일구나.』 삼각산, 인왕산, 남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땅을 보는 순간 무학대사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스님은 그 길로 태조와 만나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 하여 도성을 쌓고 궁궐을 짓기로 했 다. 

『스님, 성은 어디쯤을 경계로 하 면 좋겠습니까?』 태조는 속히 대역사를 시작하고 싶었다. 『북쪽으로는 삼각산 중바위 밖으 로 도성을 축성하십시오. 삼각산 중 바위(인수봉)는 노승이 5백 나한에 게 예배하는 형국이므로 성을 바위 밖으로 쌓으면 나라가 평안하고 흥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학대사의 뜻과는 달리 조정의 일파는 이를 반대,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태조는 입장이 난처해졌 다. 존경하는 스님의 뜻을 따르고 싶었으나 일등 개국공신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학대사와 대신들의 도성 축성에 관한 논쟁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 졌 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학대사는 인수 봉 안으로 성을 쌓으면 중바위가 성 안을 넘겨다보는 형국이므로 불교가 결코 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 도전 일파 역시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유교가 흥할 수 있다는 지론 이었으므로 무학대사 의견에 팽팽히 맞섰던 것이다. 입장이 난처해진 태조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 결정키로 했다.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 이튿날이었다. 밤 새 내린 눈이 봄볕에 다 녹아내리는 데 축성의 시비가 일고 있는 인수봉 인근에 마치 선을 그어 놓은 듯 눈 이 녹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정도전 등 대신들은 이 사실을 태 조에게 즉시 고하고 이는 하늘의 뜻 이므로 도성을 인수봉 안으로 쌓아 야 한다고 거듭 주청했다. 

『거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그 선 대로 성을 쌓도록 하시오.』 이 소식을 들은 무학대사는 홀로 탄식했다. 『억불의 기운이 감도니 이제 불교 도 그 기운이 다해 가는구나.』 그리고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 를 더 들어가라고 일러준 곳은 갈 「왕(往)」자와 십리 (十里)를 써서「왕 십리(往十里)」라 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소를 몰고 가다 무학대사의 길을 안내한 노인은 바 로 풍수지리에 능 했던 도선국사의 후신이라 한다. 이런 유래로 왕 십리에 속했던 일 부 지역이 도선동 으로 분할됐다. 도 선동은 1959년부터 행정동명으로 불 리다가 1963년 법정동명이 됐다. 

왕십리 청련사 부근에는 무학대사 가 수도하던 바위터가 있었고 주위 에는 송림이 울창했다고 하나 지금 은 주택가로 변해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청련사 밑에는 무학과 발음만 같고 글씨는 다른 무학봉이 있고 이 이름을 딴 무학초등학교가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무학봉에서 도선 국사가 수도했다는 전설도 있어 왕 십리는 도선·무학 두 스님의 인연 지인 것 같다. 무학대사는 조선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나라를 받든다는 뜻으로 사찰을 세웠는데, 그곳이 현재 정릉 에 있는 봉국사(奉國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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