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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의 효심어린 수원 용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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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92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7-07-01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전통사찰 문화탐방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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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13 07:39 조회 1,4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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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의 효심어린 수원 용주사

창경궁 안뜰엔 검은 뒤주가 놓여 있었다. 뒤주 안에선 간간이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노소론 당쟁에 개입된 몇몇 중신들의간 언에 격노한 영조의 노여움은 좀 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여드레째 되던 날 신음소리가 멎었다. 왕자가 자신이 태어난 동궁 바로 옆 뒤주안에서 죽는 참극이 일어난 것이다. 훗날 왕위에 오른 정조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캄캄한 뒤주 안에서 울부짖는 아바마마의 영혼이 매일밤 찾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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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건립된 대웅보전으로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전하고 있다


1  용주사

지난 달 일간지들에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눈물어린 편지가 공개되면서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정황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종래에는 사도세자가 몹쓸 병에 걸려 미친 행동을 하여 죽음을 재촉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으나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자세히 묘사돼 있다.


 정조의 효심이 어린 용주사를 찾는 날엔 장대비가 내렸다. 비운에 숨져간 사도세자를 위한 능침 사찰이라는 생각에서 일까. 내리는 비가 복잡한 상념을 불러 일으킨다. 대웅보전에선 화엄기도가 올려지고 있었다. 용주사 중앙선원 수좌스님들이 여럿 나와 있다. 뒷모습들이 의연해 보인다.

원래 용주사 자리엔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창건된 갈양사가 있었는데 952년(고려 광종 3)에 병란으로 소실되었다.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한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 을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옮기고 1790년 능사격으로 용주사를 건립하게 된다.

정조의 특명을 받은 보경스님은 용주사 건립을 위해 전국에서 시주를 거두고 4년간의 불사를 벌인다. 낙성식 전날 밤 정조는 거대한 청룡과 황룡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게 된다. 그래서 사명을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주사 창건 직후 팔로도승원을 두고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으며, 보경스님에게는 도총섭의 권한을 주고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현재 용주사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과 약사,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화는 석가모니와 여러 보살, 10대 제자상들을 그려 모셨는데, 음영을 두어 입체감이 느껴진다. 김흥도의 작품이라고 전한다.

그 외의 당우로는 명부전과 시방칠등각 ·  호성 전빠 · 독성각 · 등이 있다. 대웅전에는 요사채가 있는데 편액명이 다른 사찰과 달리 특이하다. 보통은 심검당(무명을 베어 버리는 지혜검), 적묵당(고요하고 적적함)등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여기는 만수리실, 나유타료 라고 되어 있다.

갈양사의 유물로는 7층 석조사리 탑과 천보루가 있는데 천보루는 여섯 개의 목조기둥 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이고 있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된다. 사찰창건이 왕실의 후원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벽면에는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넣었다.

효행본찰답게 효행박물관과 효행 교육원이 상설 운영되고 있으며, 국보 제120호 용주사 범종, 정조의 발원으로 제작된 불설부모은 중경판 정조가 심었다는 천연기념물 향나무, 등이 있다.

용주사는 불교시인 조지훈의 명시 승가 저작된 곳이기도 하다. 지난 연등축제때 연희단으로 승무를 추었던 보살님들이 소녀들처럼 좋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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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양사의 유물인 천보루, 석탑


2. 융건릉

용주사 인근에 있는 장조와 정조의 릉으로 사적 제206호 이다.

융릉은 장조와 한중록을 쓴 경의왕후혜경궁흥씨의 릉이고, 건릉은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의 릉이다.

정조(1752-1800)는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같은 해 22대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비명에 간 부친 사도세자의 혼을 위로코자 더욱더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부친의 능을 지금의 능자리인 화산으로 옮기고 재 위시 각별하게 능관리를 했다.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부근 화산일대 13개 마을에 영을 내려 집집마다 재 한 삼태기씩을 모아 뿌리게 하기도 했다,

솔밭에 송충이가 많았는데 손수나가 송충이을 잡고 심지어는 입으로 씹어 구제를 독려하기까지 했다 한다. 지금도 울창한 송림과 상록수 가 남아있다. 26만평에 이르는 드넓은 능역은 짙은 관목숲과 황금잔디, 맑은 샘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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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성

축성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원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이전하고 그 부근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현재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성 되었다.

화성은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의 역할뿐 아니라, 당쟁이 극심했던 정세를 쇄신 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의 원대한 구상아래 세워진 새로운 개념의 신도시로 건설된 곳 이기도 하다.

따라서 화성의 건설에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이 총결집되었고,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가, 번암 체재 공과 실학의 거두 정약용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그 결과 화성은 근대 초기 성곽건축의 백미로 남게 되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은 성벽의 외측을 쌓되 내측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죽내탁의 죽성술, 실학사 상의 영향을 받아 화강석과 벽돌을 함께 축성 재료로 사용한 전석교축, 목재와 벽돌의 조화로운 사용, 거중기와 활차등 근대적 기기의 발명과 사용 등 기능성과 과학성, 예술적인 아름 다움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조선 시대 절정의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축성 전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화성성역의 궤」에 따라 일부 파손된 부분을 복 원한 화성은 60에 달하는 육중한 성벽을 따라 40여개의 시설물을 갖 추고 있다. -윤우채 기자



길도반 이야기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 하는 꿈을 꾸고 지어졌다는 절이름. 용주사! 근거리에는 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 홍씨 묘인 융릉이, 또 정조대왕과 비의 묘인 건릉이 모셔져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오는 능소를 올려다보면서…. 어쩐지 빗소리가 처연한 느낌으로 다가섰다. -심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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