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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는 나라를 지킨 호국의 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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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42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1-09-05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특집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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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종열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정리 김종열 기자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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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7 09:49 조회 1,9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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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는 나라를 지킨 호국의 섬이었다”
편집위원이 가다 - 병인양요의 현장, 강화를 찾아서

유난히도 비가 많은 여름을 맞아, 맑은 하늘을 본다는 것만으로 행운으로 여겨지는 날씨였다. 8월 19일 오전 취재를 위해 강화도로 출발하는 편집위원 들은 맑은 하늘을 오랜만에 만나, 떠나는 편집위원회에 부처님의 가지력이 통 했다고 다들 기뻐했다. 서울로부터 약 60KM 떨어진 강화는 경기도와 서해바 다, 그리고 인천과 인접한 섬이다. 지금은 두 개의 다리로 경기도 김포와 연결 되어 섬이라는 인상은 없다. 행정구역으로는 인천광역시에 속해있다. 한강 하 구를 막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는 강화를 역사의 격랑 속으로 몰고 들어간다. 멀리 고려로부터 근세에 이르기 까지 임시수도로 외적에 항거한 최후의 보루 로서 많은 사건과 유적이 남아있는 곳, 지금부터 강화를 살펴 보자.   



-호국의 역사 (강화의 지정학적 위치) 


강화도는 지질학적으로는 마식령산 맥의 끝과 김포반도가 연결되어 있던 지점으로 침식작용으로 섬이 되었다. 서해로 흐르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은 강화 앞바다에서 합류한다. 강화 라는 이름은 고려에 들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시대에는 혈구군 으로, 신라때는 해구군으로 불리웠고, 고려 문종 때 처음으로 강화군으로 표기된다. 강화는 한강하구에 위치한 섬으로 황해도 개성과, 경기도 김포 를 접하고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 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강화 도는 흔히 민족의 성지이자 호국의 성전이라 불린다. 남북의 길이 28km, 동서길이 16km, 둘레 112km, 면적 407.7k㎡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로 크다. 강화도에는 수많은 국방 관 련 유적들이 해안을 따라 들어 서있 다. 16km에 달하는 내외 성곽, 그리 고 4개의 진을 비롯하여 7개의 보와 53개의 돈, 8개의 포대, 8개의 봉화대 가 위치해 군사 요새를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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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남해안도 아니 고, 북방의 오랑캐 접경지대도 아닌 데 이렇듯 많은 국방시설물들을 필요 로 한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를 통해 보면 강화도가 외적에 넘어가면 곧이 어 우리나라 전 국토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 고종 18년 (1231년) 몽고의 침략을 당하자, 이듬 해 강화로 천도, 39년간 몽고군과 대 치하면서 항쟁하였다. 이때 불심(佛 心)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16년 동안 팔만대장경을 조판했으며 더불어 마 니산 꼭대기의 참성단을 중건, 하늘 과 단군에 제사지내고 우리 민족이 하나로 단결, 외적에 대항하여 나라 를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조 선조 병자호란 당시 왕실과 신하들이 모두 강화로 피난하고, 인조는 남한 산성으로 피난했으나, 남한산성보다 강화가 먼저 함락 당하자 인조는 굴 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조선 말 기에는 통상을 위해 우리나라를 압박 한 서양인들과 여러 번 전투가 벌어 진 곳이기도 하다. 

1866년 프랑스와 맞서 싸운 병인양요와 5년 뒤 미국과 싸운 신미양요는 희생은 있어도 강화 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1871년 일 본이 강화에 침입, 이른바 운요호 사 건을 일으키고 이듬해 대규모 군단을 보내 강화도에 상륙, “강화도 조약”을 강제로 맺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얼 마 뒤 조선은 일본에 강제로 병합하 되는 운명을 맞게된다. 이런 역사적 사건의 원인은 강화도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외 세의 침략이 북쪽에서 올 때는 압록 강과 두만강 쪽이지만 서구 열강이나 일본 쪽에서 보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야 하는데 서울인 고려의개경 과 조선의 한양에 가장 가까이 있는 섬이 강화도이다. 그곳에서 배를 타 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마 포나루를 통해 서울을 침공할 수 있 다. 그렇기에 강화도에는 예로부터 서울수비를 위한 국방시설이 많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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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침공을 부른 병인년(1866년) 천주교 박해 


고종(高宗) 3년(1866년) 대원군 치 하에서 한국 천주교 사상 최대의 가 혹한 박해가 일어났다. 병인박해이다. 이 사건의 원인은 당시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서 비롯 된다. 고종 1년에 러시아인들은 함경 도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한 다. 당시 대원군과 정부는 러시아의 요구에 대처할만한 아무런 대책을 강 구하지 못했다. 고종 2년(1865년) 9월 에 재차 러시아인들이 경흥부에서 통 상을 요구해 온다. 당시 승지인 남종 삼 등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맺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 시아의 남하 정책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러시아의 위 력에 두려움을 느낀 대원군은 남종삼 의 건의를 받아들여 당시 프랑스 선 교사 들이 주류를 이루던 천주교에 협조를 요청한다. 대원군은 남종삼에 게 한국교회의 책임자인 베르뇌 (Berneux) 주교와 만남을 요청하고, 만일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준다면 천 주교에 대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겠다 고 제안한다. 남종삼은 황해도에서 포교 중이던 베르뇌 주교에게 인편을 보내 서울로 돌아오게 한다. 그로부 터 한달 뒤 병인년 (1866년) 1월 31 일 남종삼은 주교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다시 대원군을 방문한다. 그런 데 대원군의 태도는 너무나 냉담했 다. 대원군의 태도가 돌변한 원인은 얼마 전에 북경에서 보내온 조선사신 의 서신이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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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야기된 청나라와 영 국, 프랑스 간의 전쟁은, 1860년 영불 연합군에 의해서 북경이 함락된다. 이때 청나라 조종의 위신은 바닥에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분 개한 중국인들이 보복으로 외국인 선 교사와 중국인 신부, 신자들이 닥치 는 대로 살해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었다. 

여기에서 큰 힘을 얻은 보수적 인 유교 관리들은 대원군의 천주교 교섭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교도들의 탄압을 촉구하고 나섰다. 더구나 당 시 운현궁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 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까지 들고 나오자, 정치적 수세에 몰린 대원군 은 천주교의 탄압을 결심하고 선교사 들의 체포를 명령한다. 이 가혹한 박 해로 한국에 있던 선교사 12명 중 9 명이 처형되고, 남종삼, 정의배 등 수 많은 저명인사들이 참수되었다. 불과 수개월 동안에 조선 반도에서 약 8천 명에 달하는 천주교인이 목숨을 잃는 다. 



-프랑스의 침공 그리고 약탈 


겨우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중국 톈진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 나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 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 다. 조선의 상황을 보고받은 북경 주 재 프랑스 대리공사는 청나라 조종에 공식적인 서한을 보내 조선으로 진격 할 의사를 밝힌다. 이후 어떠한 사태 가 발생하든 청나라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고 통고한다. 청나라는 조선 에 이를 알리고 방비할 것을 권유한 다. 프랑스 동태를 알게 된 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며, 국경의 수비를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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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년 9월 18일 로즈제독은 박해를 피해 탈출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인 3명의 안내를 받아 조선 침공을 감행한다. 프랑스 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와 한 강 하구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 과하여, 서울 근교 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다. 극도로 긴장한 대원군은 어영중군 이용희에게 경인연안을 엄 중 경비하도록 하였다. 프랑스 함대 는 이러한 경비태세에 불리함을 느꼈 는지, 9월 25일 강류·연변만 측량하 고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로즈 제독은 순양함 게리에 르를 위시한 군함 7척과 600명의 해 병대를 이끌고 부평부 물치도에 나타 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 병대가 강화부 갑곶진을 통해 상륙한 다. 이에 진해문 부근의 고지를 점령 한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 언한다. 10월 16일 프랑스군은 강화 성을 총공격, 교전 끝에 점령하고, 강 화성 내의 무기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강화성 함락을 전해들은 조종은 이경하 ·신헌 ·이기조 ·이 용희 ·한성근 ·양헌수 장군에게,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 ·통진 ·문 수산성 ·정족산성 등에 최후의 배수 진을 치도록 명령한다. 

조선은 10월 19일 일단 프랑스측에게 격문(檄文) 을 보내어, 선교사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함대의 불법 침범을 들어 당장 물러날 것을 통고한다. 로즈제독은 회답을 통하여 선교사 학살을 비난하 고, 그 책임자를 처벌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자기와 조약의 초안을 작성 하라고 맞선다. 10월 26일 밤 프랑스 군 약 120명은 조선군의 진지를 파악 하기위해 문수산성을 정찰 감행한다. 한성근 장군의 소부대는 미리 잠복하 여 침투하는 프랑스군을 무려 27명의 사상자를 내는 전과를 올린다. 처음 으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은 프랑스 군함은 보복조치로 민가 ·군영을 가 리지 않고 황해도 연안까지 무차별 포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11 월 7일 프랑스 해병 160명은 대령 올 리비에의 지휘로 정족산성을 공략하 려다가 잠복 ·대기 중인 양헌수가 이끈 500명 사수들의 사격을 받아 사 망 6, 부상 30여 명의 손실을 입고 간 신히 갑곶진으로 패주한다. 

정족산성 에서의 참패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 게 저하시켜, 로즈 제독의 철수 결정 을 이끌어낸다. 11월 11일 프랑스군 은 1개월 동안 점령한 강화성에서 철 수하면서, 장녕전 등 모든 관아에 불 을 지르고, 은괴 19상자(당시 화폐로 환산하여 3만 8000달러)와 대량의 서 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 으로 떠난다. 

이때 외규장각 왕실의 궤도 함께 약탈된다. 비록 한 달 동안 강화성이 함락되었지만, 서구 열강의 대포도 두려워 하지 않는 용감한 장 수와 병사들의 뛰어난 전략으로 강화 는 잠시 안정을 되찾는다. 프랑스군 격퇴에 힘을 얻은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시대의 흐름을 뒤로 한 쇄국정책을 더욱 굳혀간다. 그러 나 얼마의 시간이 흐른후 강화도는 근대 조선의 역사를 바꾸는 현장으로 다시 역사의 전면에 선다. 



-고려궁지와 외규장각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사적 제133 호 고려궁지는 강화의 역사를 고스란 히 품고 있는 현장이다. 이곳은 몽고 의 침략에 항전하던 고려가 강화 천 도 후 터를 잡은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 몽의 기치를 높이든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로 천도를 결정한다. 강화로 천도한 고종은 약 2년에 걸쳐 연경궁을 중심으로 궁궐 과 관아 건물을 짖고, 명칭을 개경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 뒷산도 송 악산이라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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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년 몽고 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경으로 환도 한 뒤 궁궐과 성은 무너졌다. 그후 고 려궁지에는 조선이 들어서고 장령전, 행궁,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 정, 세심재 등의 궁궐 건물과 지방 관 아인 유수부 건물들이 건축되어진다. 유사시 왕이 거주 할 수 있도록 그 규모를 갖춘다. 외규장각은 1782년 2 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이 다.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 서관 역할을 하였다. 설치 이후 왕실 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 한 의궤를 비롯해 총 1,000여 권의 서 적을 보관한다. 임진왜란으로 유일하 게 남은 왕조실록의 보관을 위해 지 어진 정족산성의 사고와 더불어 조선 의 기록문화를 보관하는 중요한 위치 를 차지한다. 고려 궁지는 그 시작이 몽고에 항거하기 위한 임시 수도의 중심으로 출발하여, 조선에 들어 병 자호란까지 왕실의 최후 보루 역할을 묵묵히 담당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 랑스군이 철수 하면서 모든 건물들에 불을 질러 지금은 명위헌·이방청 그 리고 최근 복원된 외규장각만이 천년 의 터를 지키고 있다. 



-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강화의 문화유적 


강화는 선사시대부터 이미 사람들 이 거주하였다. 우리나라 그 어느곳 보다도 다양한 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는 지역이다. 특히 청동기 시 대의 강화고인돌은 지난 2000년 11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될 만 큼 역사적 가치가 높다. 강화군 하점 면 부근리 일대의 고인돌들은 지석 묘, 돌멘(dolmen)이라 불리며 북방 식·남방식·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 류한다. 이곳 고인돌군은 16기(基)의 북방식·남방식 고인돌이 고루 분포 해 있다. 이 가운데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된‘강화지석묘’는 중부지방에서 는 보기 드문 거대한 북방식(탁자식) 이다. 북방식 고인돌의 구조는 4장의 굄돌로 직사각형 돌방을 구축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어 놓는 형식이 다. 

화강암 계통의 석재를 사용하였 고, 지상 높이 260cm, 길이 710cm, 너 비 550cm로 남한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고인돌이다. 강화는 대장경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관중인 팔만대 장경이 강화에서 만들어진‘재조대장 경’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는 부인사에 있던‘초조 대장경’이 소실되자, 부처님의 가지 력으로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 여 다시 대장경을 만들기로 한다. 고 려 고종은 강화에 대장도감을 새로이 설치하고, 1236년(고종 23)부터 1251 년(고종 38)까지 약 15년에 걸쳐 재 조대장경을 완성시킨다. 처음에는 강 화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 판당에 수 장되어 있었다. 후에 강화의 선원사 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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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 서울의 서 대문 밖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다시 합천 해인사로 옮겨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1866년 병인년 천주교 박해로 시작 된 병인양요를 치른 역사적 현장인 강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 당이 있다. 1890년 영국 성공회가 우 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파된 후 1893년 영국인 왕란도 신부가 강화읍 갑곶리 에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두 번의 양 요로 외국인의 접근이 어려웠던 당시 를 감안하면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일 이다. 전통 사찰의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멀리서는 사찰이나, 향교 건 물로 보인다. 성당은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이 결합된 독특 한 구조다. 1900년 완공된 강화성공 회성당을 거점으로 영국성공회는 본 격적인 한국 선교를 시작한다. 


‘편집위원이 가다’강화편은 취재 에 참석한 모든 위원들이 디지털 카 메라를 지참하였다. 출발하기 전 무엇을 취재 할 것이 며, 교도들에게는 어떤 정보를 전할 것인가를 여러 번 고민 했다. 각자가 사전조사를 거쳐 현장에서 취재 노 트를 작성했다. 그만큼 강화에 대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140년 만에 재 자리를 찾은 조선왕 실위궤의 흔적을 찾아 강화 외규장 각 앞에 섰을 때는, 건재했을 고려 궁지의 여러 건물들을 상상 속에서 만났다. 또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 약탈 에 정신없는 프랑스 군인들의 발자 국 소리를 듣는 듯 했다. 지금은 유 허만 남아 조용한 잔디밭으로 변했 지만, 당시의 아픈 역사는 지금도 계 속되고 있다고 느꼈다. 편집위원회는 매월 주제를 정해 편집위원과 통신 원이 함께 취재를 하고자 한다. 교도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과 격려 부탁 드립니다. 


취재=편집위원 박묘정, 박정희, 강경민, 통신원 밀인사 장경임 

정리=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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