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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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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93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7-08-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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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중앙교육원장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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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14 05:07 조회 1,77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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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알기쉬운 밀교상식 (4회)

인도의 밀교

인도의 밀교는 대승불교가 한창이던 3〜4세기 경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단편적으로 경전에 만트라가 삽입되었고 밀교적 요소가 조금씩 반영되고 있었다. 부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시작되었던 대승불교가 너무 이론적인데 치우쳐 그 신선한 힘을 잃어갈 즈음에 바라문교는 불교의 사상을 모방하고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힌두교로 탈바꿈하면 서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이에 자극 받은 불교도 대중들을 귀의시키기 위하여 힌두교를 비롯한 인도 고유의 신앙을폭넓게 수용하면서 이러한 요소들을 불교적으로 순화하였다.

초기의 밀교경전에서는 단순히 현세이익을 추구하는 만트라나 다라니 등이 많았다. 재물의 이익이나 건강, 장수를 기원하는 것에서부터 재앙을 소멸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로 경전이 만들어졌 는데 이 시기의 밀교를 초기밀 교라고 하며 흔히 잡밀 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고차원적인 성불지향의 것들로 순화되었다. 현재의 불교의 의례나 의식 등에는 이 시기의 모습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진언을 외우고 '인계를 맺으며 공양물을 올리는 것들이다 이 시기의 밀교적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보살들이나 명왕, 천룡팔부 등의 호법 신장들, 혹은 절에서 쓰이는 여러 가지 불구등도 인도 고유의 신앙에 바탕을 둔 초기 밀교의 영향 아래에서 불교적으로 의미가 순화된 것 이라고 보면 된다.

이러한 경향이 더욱 무르익 어 7세기경에 등장한 대일경 과 금강정경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밀교다운 체계를 갖추게 되 었다. 이 시기는 중기밀교의 시대로서 성불지향의 이러한 밀교를 순밀이라고도 한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 등지에 전해진 밀교는 대부분이 바로 이러한 시기의 밀교였다.

9세기 이후의 밀교를 후기밀 교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남녀의 교접과 생리적 행법을 응용하여 성불에 이르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시기의 밀교를 딴뜨라 밀교, 혹은 좌도 밀교로 부른다. 딴뜨라는 불교 경전인 수트라와 대비되는 것 으로서 딴뜨라라는 말 자체는 ‘연속’ ‘상속’의 의미가 있으며 주로 후기밀교경전을 가리 키는 말로 쓰였다. 특히 티벳에서는 밀교경전은 모두 딴뜨라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딴뜨라나 딴뜨리즘이 라고 하면 성행위를 수행방법 으로 도입한 인도 계통의 종교 전반에 대해 쓰이기 때문에 반드시 밀교경전이나 밀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성력에 의지한 수행 방법은 인도 고유의 샤끄띠 신앙과 결부된 것으로서 샤끄띠 신앙은 여신을 숭배하는 신앙 이다. 베다나 초기의 힌두교에서 여신숭배신앙은 비교적 미미한 것이었으나 10세기 이후 샤끄띠 신앙이 인도 전반에 확산되면서 후기 밀교도 그러한 영향권 하에 들었던 것이다. 현재도 딴뜨라 계통의 샤크티 신앙은 벵골이나 오릿사 등 인도 동부와 카투만두 분지 등에 서 성행하고 있다고 하며 후기밀교의 흔적은 네팔의 일부와 부탄 등지에 일부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후기 밀교는 시간이 흐르면서 불교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너무나 토착화, 속신화 되어 버렸으며 1203년 최후의 불교거점이었던 비크라마쉴라 사원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하여 무참히 파괴됨으로써 인도의 불교는 후기 밀교의 종식과 함께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 밀교의 천통은 8세기에 찬드라 굽타와 빠드마 삼바바 등에 의하여 티벳으로 전해졌다. 또한 선무외나 금강지 등의 인도 출신 고승들도 8세기 초에 중국에 들어가 중기의 정통 밀교를 전했다.

-화령 (중앙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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