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지 삼장의 제자 불공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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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00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08-03-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설화/교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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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19 05:22 조회 1,967회본문
금강지 삼장의 제자 불공 스님
인도의 밀교를 중국화하다
불공 삼장
불공 삼장은 중국의 밀교를 대성한 위대한 밀교승 이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대부 분이 수수께끼 에 싸여 있는 데 순수한 중 국인이 아닌 인도인의 피가 섞인 서역 사 람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서기 705년 에 태어나 10 세 때인 714년에 양친을 잃고 중국 감숙성의 무위에 들어 옴으로써 중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13세에 장안에 들어와 15세인 719년에 출가하여 금강지 삼장의 제자가 되었다.
불공의 전기에 의하면 금강지 삼장은 처음에는 그 를 중시하지 않았는데 꿈을 꾸다가 그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알고 법을 이을 제자로 잘 키웠다고 한다. 금강지가 입적한 후 불공은 해로로 남인도와 스리랑 카를 방문하고 많은 밀교경전을 구하여 돌아왔다. 그 는 또한 스리랑카에서 보현 아사리로부터 새로 운 밀교를 배워 오기도 하였다.
귀국 후에 불공은 ( 금강정일체여래진실섭대승현증 대교왕경) 3권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현재 한문으로 번역된 밀 교경전의 절반 이상이 불공 삼장이 번역한 것이며 전부 110부 132권의 경전을 번역했다.
불공은 구마라집, 현장 스님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역경가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불공은 현종과 그 뒤 를 이은 숙종, 대종의 국사로서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당시는 안사의 난이 일어났 던 시기로서 불공삼장은 장안의 대흥선사에서 단을 쌓고 밀교의 의례에 의하여 난이 평정되기를 기원했다.
그는 또한 문수보살의 성지인 오대산에 금각사를 재건하고 전국의 사원에 밀교화한 문수보살상을 모 실 것을 권했는데 아쉽게도 그가 입적함에 따라 이 러한 사업은 제대로 보급되지 못했다.
그러나 불공 삼장에 의한 방대한 밀교 경전의 번역 과 황실을 비롯한 상류층을 통한 민간에의 밀교보급 등은 밀교가 일반 대중들에게 전해진 계기가 되었다. 한 마디로 불공삼장은 선무외삼장과 금강지 삼장에 의하여 도입된 체계적인 중기 밀교를 중국화하여 일 반 민중에게 까지 밀교를 보급한 중국밀교의 대성자 라고 할 수 있다.
774년에 70세를 일기로 입적했으며 나라에서는 대 변정광지불공삼장이라는 시호 를 내렸다.
대일경과 금강정경을 결합한 혜과 아사리
양부만다라로서 밀교의 세계를 나타내다.
불공의 뒤를 이은 혜과아사리는 <대일경> 과〈금강정경)을 조합하여 체계화 했으며 양부 만다라를 교학적으로 조직화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선 무외삼장이나 금강지 삼장. 혹은 불공삼장이 인도 계 통의 승려였던 것과는 달리 순수한 중국인이었다. 혜과 아사리는 746년에 서안에서 태어났는데 속성은 마씨였다. 9세 때인 755년에 청룡사성불원에서 불공 삼장 문하의 한 사람인 담정의 밑에 출가했다. 그리고 762년부터 직접 불공으 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20세 때인 766년에 정식 으로 구족계를 받고 불공삼장으로부터 금강계의 대 법과 제존의 유가법을 배웠다. 일설에는 양부의 대법 을 배웠다고도 한다. 767년에는 선무외 삼장의 제자인 현초스님(신라인)으로부터 태장법을 배웠다. 원래 불공삼장의 부법제자는 혜랑이라는 장로였다. 그러나 혜랑은 불공이 입적하고 불과 4년 뒤에 입적 하고 만다. 불공이 입적 후 차례로 사형들이 입적함 에 따라 법맥의 계승자는 혜과가 되었다.
인도 밀교에서는 대일경 계통과 금강정경 계통의 밀교가 따로 전해져 왔지만 불공과 혜과를 거치면서 이 둘은 “양부의 대경”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받들어 져 왔다. 불공이나 일행은 대일경 계통의 태장법과 금강정경의 유가 법에 모두 통달 했지만 어느 한 쪽이 주가 되고 나머지 하나는 보충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취 급된면이 있지만 혜과는 이 둘 을 동등하게 놓고서 ‘양부 대 경’ 혹은 ‘양부 만다라라는 이름 으로 교리를 체계화 시켰다.
이 양부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것은 일본의 공해였다. 혜과의 만년에 중국을,방문한 공해는 혜과로부터 양부대법을 전수받고 일본으로 돌아가,이를 토대로 진언종을 창종했다. 혜과 아사리는 밀교의 교학적 완성 이외에도 수시로 밀법 도량을 설치하여 나라의 안위와 백성들을 위한 밀교의 비법을 행하여 이들에 게 밀교를 전파했다. 776년에는 나라로 부터 국사의 칭호를 받았다. 혜과는 물욕이 없고 보시금이 들어오 면 만다라를 제작하거나 사원을 수리하는데 모두 썼 으며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재시를 베풀 고 어리석은 자들은 법으로써 인도했다. 그렇기 때문 에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혜과 아사리를 뵙기만 하면 모두 감화되었다고 한다. 또한 재세시에 대종, 덕종, 순종황제의 세 황제가 그에게 귀의했기 때문에 그를 삼조의 국사라고도 불렀다. 805년 60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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