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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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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96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7-11-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진리의 여울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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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18 08:48 조회 1,7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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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바라밀

대승 보살의 방편 

지승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어떤 것이 보살의 방편이며, 보살은 어째서 방편을 씁니까?”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 “방편을 쓰는 보살은 한덩이 밥을 가지고도 일체 중생에게 보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살은 한 덩이 밥을 베풀 때에도 일체 중생이 지혜를 얻도록 발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중생과 보리로 회향하게 된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보살이 보시하는 사람을 보면 같이 기뻐하는 마음을 내고, 이 기뻐하는 선근이 중생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보살은 시방세계 중생들이 누리는 온갖 즐거움을 보면, 일체 중생이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다. 만약 고통받는 것을 보면 중생들을 위해 모든 죄를 참회하고, 중생들의 고통을 모두 내가 대신 받아 그들로 하여금 기쁨을 받도록 원한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마침내는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만을 누리기를 원한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보살은 한 부처님께 예배 공양 찬탄하면 곧 모든 부처님께 예배 공양 찬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은 한 법계 한 법신이며,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이 모두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보살은 자기 자신이 모자란다 할지라도 스스로 경멸하지 않고, 게송 하나라도 알게 되면 이렇게 생각한다. ‘이 한 구절의 게송을 아는 것이 곧 모든 법을 아는 길이다. 모든 법이 이 게송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도시와 시골로 두루 다니면서 자비심으로 부지런히 법을 설한다. 이양이나 명망이나 찬탄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들려주어 게송의 인연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아난다와 같이 불법을 많이 듣고 여래의 변재를 얻어지이다’ 하고 원한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보살이 방편으로 보시할 때 육바라밀이 갖추어진다. 왜냐하면 보살은 걸식하는 사람을 보면 아끼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져 큰 보시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시바라밀이다.

스스로 계행을 닦고 계행을 가지는 이에게 보시하고, 계행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지도록 권한 후에 보시한다. 이것이 지계바라밀이다.

스스로 성내는 마음을 없애고 자비롭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 중생을 보살피고 평등히 보시한다. 이것이 인욕 바라밀이다.

음식이나 약을 보시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몸과 마음에 정진을 갖추어, 오고 가고 앉고 서는 온갖 동작을 자유롭게 한다. 이것이 정진바라밀이다.

중생들이 그 보시를 얻으면 마음이 안정되어 기뻐하고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것이 선정바라밀이다.

이와 같이 보시를 한 다음에는 돌이켜 생각한다. ‘보시를 한 사람은 누구이며 보시를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누가 그 복을 받을 것인가.’ 이렇게 헤아려 보시한 사람과 보시 받은 사람과 그 갚음을 가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지혜 바라밀이다.

어와 같이 보살이 방편을쓰면 윢바라밀이 갖추어지게 된다.”〈보적경 대승방편품〉



육바라밀을 성취하려면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바라밀에는 세 가지가 있소. 즉 세간의 바라밀과 출세간의 바라밀과 출세간 최상의 바라밀이오.

세간의 바라밀이란 어리석은 범부가 나와 내 것에 집착하고, 그 두 가지 치우친 소견에 떨어져 훌륭하고 묘한 경계를 얻기 위해 바라밀을 행하고 물질적인 현상과 과보를 구하는 것이오. 어리석은 범부는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 등 여섯 바라밀을 행하여 범천에 나기도 하고 세간의 법인 다섯 가지 신통을 구하기도 하니 이것을 세 간의 바라밀이라 합니다.

출세간의 바라밀이란 성문과 독각이 성문과 독각에 알맞은 열반의 마음을 가지고 수행하는 바라밀이오.출세간 최상의 바라밀이란 자기 마음의 허망한 분별로써 바깥 경계가 나타난 것임을 분명히 아는 것이니, 그때에는 오직 그 마음만이 안팎의 법을 나타낸 것임을 여실히 압니다. 왜냐하면, 허망한 분별로 분별하지 않고 안팎의 마음과 물질의 모양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오.

보살은 모든 법을 똑바로 알면서도 일부러 보시바라밀을 행하니, 그것은 일체 중생에게 두려움이 없는 평안한 즐거 움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시바라밀이라 합니다.

보살은 모든 법을 관찰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서도 맑고 시원한 법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계바 라밀이라 합니다.

보살은 또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고행을 참으면서 그 경계가 진실이 아님을 분명히 압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인욕바라밀이라 합니다.

보살은 어떻게 정진의 행을 닦는가 하면, 초저녁과 밤중과 새벽을 가리지 않고 항상 부지런히 수행하여 진여의 법 을 그대로 따라 온갖 분별을 끊소. 그러므로 그것을 정진바라밀이라합니다.

보살은 분별하는 마음을 떠나 저 이교도들의 ‘취할 수 있다’ ‘취할만하다’ 는 경계의 모양을 따르지 않소. 그러므로 그것을 선정바라밀이라 합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지혜바라밀인가 하면, 보살은 제 마음의 분별하는 모양을 분명히 관찰하여 분별하는 마음으로 보지 않으므로 두 가지 치우친 견해에 떨어지지 않소. 진실한 수행에 의해 한 법도 나거나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고 제 마음으로 증득한 거룩한 행을 닦소. 그러므로 그것을 지혜바라밀이라 합니다.

〈능가경 찰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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