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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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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94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7-09-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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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14 07:04 조회 5,40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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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세계속의 불교 (2회)

방글라데시 불교

방글라데시 2004년도 인구는 1억2천 5백만명으로 불자는 1백만명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이들을 대부분 치타공, 치타공 힐트렉, 코밀라, 노악할리, 콕스 바자와 바리살에서 살고 있다. 방글라데시 불교는 오스틱, 티베토-버어마, 드라비다, 아리안의 네종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점차적으로 하나로 통합되어가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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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의 불교마을과 사원

역사가들에 의하면 티베토 ·  버어만은 퓨, 칸얀, 테트(챠크마) 3종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챠크만은 역사적인 땅인 차타공 힐 트렉에 살고 있으며, 칸얀은 치타공의 남동쪽에 살고 있는 락힌 (마라카네스)로 알려져 있고, 부루나 불교로 잘 알려진 방글라데시의 일반 불교는 5천년 동안 살아온 고대인들의 거주지에서 성행하고 있다. 이들은 아르바바르타와 팔리어문학권인 마드햐데시나 마 즈히마데시로 잘 알려진 아리얀에서 발생한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처님은 B.C 6세기 경에 마즈히마데쉬 혹은 마하샬의 아래지역인 카장갈 마을의 동쪽인 중부지역, 살라라바티(사라바티)강의 남동쪽, 사타카니카 마을의,남쪽, 투노의 브라흐만 지역의 서쪽, 우시 라트하자 산의 북쪽에서 불교를 설하셨다. 부처님은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걸어서 이 지역들을 여행하셨으며, 불자들은 부처님이 전지전능하심을 믿으셨고, 부처님은 전지전능하신 눈으로 세상을 보았으며, 온 세상의 불국토를 위해 노력하셨다.

드한야와디 역사가는 부처는 마하 므라트 무니 로서 알려져 있다고 주장한다. 마우리스 콜리스는 그의 저서「위대한 인물의 땅」에서 부처의 상은 1784년 무하마의 정복자들에 의해 만다라바로 옮 겨졌다고 전한다. 안구타라라니 카야와 마즈히만니 카야 부처는 카잔갈에서 왔으며, 그의 추종자들에게 두가지의 계시를 주었다. 어떤 계시가 주어졌는 지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단지 부처의 생존시에 불교가 방글라데시에서 성행된 것은 한 두 명의 방칼인의 스님에 의해 불교가 전파되고 배우게 되었다고 추측한다.

우리는 불교가 아소카왕 전성기 시대에 방글라데시에의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마타리무트라의 3번째 불교 전시자. 소낙과 유타라는 수바나비후미에 갔었고 남동아시 아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최근 한 두명의 학자에 의하면 드하카 주변인 담이에서 아소카왕의 돌 기둥이 발견되었으며 여기서 보티브 작품이 발견 되었는데 기원전에 불교가 방글라데시에서 존재하였다는 추측을 갖게 한다.

방글라데시의 불교전파를 논하기 전에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결집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제1차 결집은 마라가하에서 열렸으며 아자타사트 루왕은 부처님의 법을 전파하기 위해 수년동안 순 례를 하였다. 두 번째 결집은 마이살리에서 열렸으며, 칼라소카왕은 백년동안 통치하였다. 세 번째 결집은 마타리부트라에서 열렸으며, 마우르얀 아소카왕이 집권하였다. 그 기가동안 많은 지역에서 불교가 성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카니시카왕의 지도아래 불교를 숭상하였다. 결집에서는 트리피 타가를 바로잡지 못했지만 부바하샤 ·  샤스트라로 알려진 논서를 만들었으며, 산스크르트어를 새로운 기초적인 대승교리로 인정하였다. 결집의 영향으로 마흐바그호샤, 마르스바, 부쉬미트라와 같은 작품의 영향으로 대승불교는 중국, 일본, 한국과 같은 중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대승불교는 자바와 보르네오의 남동아시아까지 전파되었다. 대승교단의 도래로 불교의 교육적 센터가나란다에 설치되었다. 나가주나는 여기에서 ’ 수십년 동안 생활하였다. 굽타왕조시기에 나란다 대학은 불교, 논리학, 철학, 법률, 의학, 요가, 연금 술, 점성술 등을 교육하였으며, 3천에서 1만명의 스님을 교육하는 큰 규모의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나란다 대학은 몇 개의 왕조를 거치는 동안 국왕들의 지원으로 국제적 학문의 장소로 유명하였으나 1,200년 경에 투르트족에 의해 파괴되었다.

굽타왕조 초기에 방글라데시 불교의 성장은 기원전 후에 방글라데시 독자적인 불교로 성장하였다. 현재 그 시대의 불교는 대승불교의 교리를 따랐다.

파-헤인은 갠지즈강의 남쪽에 위치한 참파왕조는 대부분 대승불교를 신봉하였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7세에는 고우다 왕시기에 방글라데시에 대승 불교 다양한 분야의 불교가 존재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7세기에서 12세기까지 방글라데시는 대승불교의 황금시대였다.

불교승려들은 파티모크하의 교리를 따르지 않았으며, 수행자들은 불교의 사상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두르카, 칼리, 마크스미, 마나사, 카르타카 등 많은 다른 신과 여신을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불교의 전통과 무관한 많은 제례나 의식을 따르고 있다. 많은 불자들은 방글라데시의 타락한 현상을 바로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치타공은 아라칸의 고대 수도인 모로항을 방문하였으며, 9개의 사원에 설치된 하마무니의 불상을 보게 되었다. 그는 마하무니 불상의 원형을 그리고 크기와 규모등 상세한 조각을 하여 방글라데시로 돌아온 후 마하무니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의 교단을 조직하지는 못했다. 마하스타비르도 버어마에서 불교조각을 공부하여 돌아와 방글라데시의 타락한 불교를 타파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게 되어 방글라데시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미래의 불교에 대해 걱정 하고 있다. 라드후 메트, 브히쿠와 같은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하며 고민하고 있다. 산스크리트와 팔리어에 능통한 사라메드 마하스타비라는 순례자로서 인도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상하라즈 사라메드하 마하스타비르를 만나 방글라데시의 불교상황에 대해 토론하고 그를 방글라데시로 초청하였다.

그는 치타공에 머물면서 많은 불자들을 포교하였으며 7명의 스님들을 배출하였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처음인 무카삼파다 의식이었으며 소승불교의 시작을 알렸다. 아라칸의 고대 왕들은 종교적으로 신봉할 수 있는 특별한 직위를 받은 유명한 브힉쿠스에게 전례없는 경의를 표하였다. 사라메트하는 영국 정부에 의해 높은 지위를 얻는 영광을 받았으며 상하라이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되었으며 추종자들은 상하라즈 니카야로 알려진 소승불교의 규정을 마련하게 되었다.

<자료출처 : http://www.buddhanet.net/e-learning/ history/ buddhistworld/bangladesh-txt.htm 번역/지정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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