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생애와 열반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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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25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8-07-30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법상인 전수의 總持法藏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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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21 03:29 조회 3,954회본문
우리가 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콘텐츠 안에서 만나는 부처님은, 굉장히 특별한 모습으로 그려 집니다. 선택받은 존재인양, 때로는 신의 아들 이라도 되는 듯, 초인적인 부분이 강조되어 있 습니다. 하지만 사실 부처님은 그렇게 특별하고 유별난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평범한 사람들이 하지 못했던 깨달음, 그 깨달음을 통해서 부처가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부처라는 이 단어는 Buddha (붓다)에서 유래하였는데, 사람들이 부르기 쉽 게 우리 식의 발음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은 35세에 깨달음을 얻었고, 이 깨달음으로 인해 Buddha, 즉 부처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80세에 세상을 뜨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다 음의 45년간이 부처로서의 활동 기간이라고 보 면 되겠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45년간 쉼 없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전파하는데 애썼 습니다. 그 결과 많은 제자들이 불교에 귀의하 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불교문화라는 것도 형성 되었습니다. 당시의 경향을 보면 종교를 전혀 지 니지 않은 사람이 불교에 들어오기보다는, 기성 종교에 이미 몸을 담고 있던 사람들이 불교로 전 향한 경우가 많았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불교세 력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부터는 늘 1,200 명 정도의 제자들이 부처님을 항상 따라다녔다 고 합니다.
제자들은 천민부터 고위직 대신과 왕 족에 이르기까지 출신계급의 폭이 넓고 다양했 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데 신분의 제 약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실제로도 귀의 후에는 부처님 안에서 모두가 동등한 대우 를 받았습니다. 신분이나 직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차등 없이 서로를 대했습니다. 정말 그랬는지는 ‘우 바리’ 일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제 자 중 뛰어난 10명을 꼽아 10대 제자라고 일컬 었는데 그 중 하나의 이름이 ‘우바리’였습니다. ‘우바리’의 직업은 이발사였는데, 그 때의 이발 사는 천한 하층 계급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그 렇다고 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바리’보다 더 늦게 부처 님의 깨달음을 만난 일곱명의 출신 계급은 왕자 였는데, 언제나 ‘우바리’가 일곱왕자 보다 더 나 은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먼저 받은 이가 ‘우바 리’였던 까닭입니다. 이는, 신분에 따라 행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따라서 신분이 달 라짐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혈통으로 인해 무언가가 정해지 는 일은 없습니다. 신분으로 인한 벽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본인의 마음이나 행동으로 인해 신분이 정해질 수는 있습니다. 양반의 행동은 양 반을 만들고, 천민의 행동은 천민을 만듭니다. 부 처님은 시시때때로 자신의 이러한 신념을 강력하 게 전파했습니다.
부처님은 당시 인도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인 간은 모두가 다 평등하고 동일하다는 의견을 끊 임없이 피력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로부터 2,500 년이 지난 오늘날의 인도 모습은 어떤가요? 부 처님의 바람대로 되었나요? 여전히 엄격한 계 급사회로 이루어져있고, 그로 인한 차별과 폭력 이 만연한 인도의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물론, 인도 헌법 안에서는 모두 가 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차별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지만, 실제의 사회 모습을 보 면 그렇지 않습니다. 직업의 귀천도 엄연히 존 재하고 출신 환경에 따라 균등한 기회 분배에도 분명한 제약이 있습니다. 출발선이 다르고, 도 달 가능한 도착선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때문에 인도의 청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좌절은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제가불자들이 자 신의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부처님 스스로 출가하지 않았다면, 세속적인 안 락함과 편안함을 마음껏 누릴 수도 있는 환경이 었지만 결코 자기 이익만을 도모해서 살지 않았 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들이 바른길을 걸을 수 있도록, 부처님 자신처럼 깨달음을 얻 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모든 여력을 쏟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생애는 위대한 것입니 다. 부처님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염려하 고, 일생을 교화에 전념하는 위대한 삶을 살다가 80세에 열반에 듭니다. ‘열반에 드셨다.’ 우리는 이 표현을 보통 누군 가가 세상을 떴을 때 자주 사용합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따지자면, 열반과 죽음에는 그다지 긴 밀한 상관관계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속 에 많은 번뇌를 가지고 있고 이 번뇌들은 제각각 저마다의 작용을 합니다. 이를테면, 어리석음의 작용, 욕망의 작용, 분 노의 작용, 질투의 작용 등입니다. 이와 같은 번 뇌들이 없어지는 상태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초기 불교에 있어서 불교인들이 도달되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이자 이상향은 바로 ‘번뇌가 없는 상태’였지만, 이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이 땅에 발을 딛고, 호흡을 하고, 음식 물을 섭취해야 삶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제 아 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종교인이라고 한들 땅에 발을 딛지 않고, 호흡을 하지 않고, 음식물을 섭 취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의 미 안으로 활동을 줄이고 산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늘 번뇌라는 것이 일어나기 마련입니 다.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자야 하는 의식주 (衣食住)는 번뇌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았다고 한들, 깨끗한 마음만 남아있다고 한들 번뇌까지 완전히 소멸할 수는 없습니다. 그 러므로 번뇌가 없어진다는 것은, 육체가 없어진 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육체가 없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죽기 전에는 욕망이 없 어질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 때문에 죽음 은 완전한 열반이라는 말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 으로 보여 집니다 만, 불교의 최종목적은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이 는 ‘해탈’이라는 단어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불교 는 광범위한 지식보다는 깨달음을 가장 중요시 여 기는 종교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고 계율을 잘 지켜야합니다.
바르고 좋 은 습관을 익히는 것을 선계, 비뚤고 나쁜 습관 을 익히는 것을 악계라고 하는데,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비롯되고, 건강한 육체는 선계 가 쌓여서 만들어집니다. 정신의 건강성을 위해서는 행동을 바르게 해 야 함을 명심해야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마음을 통일하는 정신 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음 을 가라앉히고 하나의 대상에 정신을 전념하는 것은 마음을 맑게 만들어줍니다. 이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우리는 지혜를 얻을 수 있고, 바야흐로 지혜는 깨달음으 로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생애와 함께 열반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며 깊고 깊은 종교생활이 될 수 있기 를 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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