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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밀교2 중국의 밀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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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99호 발행인 발간일 2008-02-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설화 / 교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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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화령 (중앙교육원장/철학박사)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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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2-16 14:23 조회 3,9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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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알기쉬운 밀교상식 (10회)

중국밀교2 중국의 밀교승

<대일경》을 번역한 선무외 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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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외 삼장은 중국에 처 음으로 체계적인 밀교를 전했다. 그 의 원래의 이름은 슈바라카싱하인데 동인도 오릿사 지 방의 왕자로 태어 났다.

그의 부친은 불 수왕 이라 고 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숙부인 감로반왕 의 자손으로 전해진다. 선무외 삼장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다방면에 재주가 뛰 어나서 부왕은 여러 형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 무외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그러나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위를 물려 주고 출가했다. 출가 후에는 인도의 유명한 나란 다사원에서 현교와 밀교를 배웠다. 그의 스승은 달마국다라고 하는 아사리인데 달마국다는 그에게 밀교를 전수해 줬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가서 밀 교를 알릴 것을 권유했다.

선무외는 스승의 말대로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 하고 서역을 거쳐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도착했 다. 가는 도중에 불교도 뿐만 아니라 많은 이교도 들과도 논쟁을 벌였지만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했 다고 한다. 선무외 삼장은 삼장법사라는 이름 그 대로 현밀의 모든 교리에 정통해 있었기 때문이 다.

그가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70을 넘긴 고 령이었다. 그 당시 중국은 당나라 현종이 다스리 던 시기로서 선무외삼장이 장안에 도착한 것은 서기 716년이었다. 현종은 선무외 삼장을 극진히 영 접하여 궁중에 모셔다가 내도량 을 설치하 고 국사 의 예로서 받들었다. 선무외 삼장은 이듬해인 717년 자기가 가져온 범본 경전 가운데 에서 <허공장구문지법> 1권을 서명사 보리원 에서 번역했다.

이후 선무외 삼장은 자신이 가져온 범본 경전이 칙명에 의하여 궁중에 보관됨에 따라 제자인 일행  스님과 함께 범본 경전을 찾던 중 북인도에서 객사한 무행 스님이 가져온 경전이 장안 화엄사에 비장되어 있는 것을 알고 제자인 일행과 함께 (대일경)을 번역했으며 해설서인 <대일경소>를 남겼다.

(대일경)과 <대일경소>로 인해 중국에는 드디어 체계적인 중기밀교가 도입되었다. 선무외 삼장은 이 밖에도 <소실지갈라경> <소바호동자경>등을 번역했다. 또한 장안 에 머무르는 동안 숭악  회선사 와 불법에 대하여 토론한 것이 <무외삼장선요>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선무외 삼장의 밀교적 수행관이 잘 나타나 있다.

선무외 삼장의 제자 가운데에는 일행스님 이외 에도 현초, 의림, 불가사의와 같은 신라 스님들이 있었다. 특히 현초 스님은 혜과 스님에게 법을 전함으로써 일본 진언종의 개 조인 공해에 까지 법맥을 이었다. 의림 스님도 순효 아사리에게 법을 전함으로써 일본 태밀  의 개조인 최징 에게 법을 전하도록 했다.

선무외 삼장은 735년 99세를 일기로 장안에서 입적했다.



<금강정경>을 번역한 금강지 삼장

금강지 삼장은 선무외 삼장보다 4년 늦 은 719년에 스리랑카와 수마트라 등을 거쳐 남방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광주에 도착했다. 그는 중인도의 이샤마바츠마왕의 셋째로 태어나 10세에 나란다 사원에서 적정지 를 스승으로 출가 했다.

처음에는 서인도에서 성명학(문법학)을 배운 후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소승의 모든 학문을 배웠다. 그러다가 20세 때 다시 나란다 사원에 돌 아와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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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6년간에 걸쳐서 대소승의 계율을 배우고 중관학파의 많은 논서들을 학습했으며 28세에 카 필라바스투에서 승현논사 로부터 3년에 걸쳐 유식학을 배웠다. 31세인 7이년에는 남인도로 가서 용지보살 로부터 밀 교를 배웠다.

금강지는 중국에 온 후 장안에 도착 하여 사람들에게. 관정 을 베풀 어 밀교와 인연을 맺게 했다. 관정이 란 밀교의 법을 전 하는 의식으로서 고대 인도의 왕이 즉위식 때 4해의 물을 길어와 정수리에 뿌리던 의식에서 유래한다.

또한 인도에서 가져 온 밀교경전과 의궤를 한역 하고 기우법이나 식재법 등을 실시하여 당 항실의 신뢰를 얻었다. 금강지의 명성을 듣고 많은 제자 들이 몰려들었는데 자은사 의 의복 , 숭양사의 일행, 그리고 불공삼장 등이 그들이었다.

금강지는 <금강정유가중약출염송경> 4권을 번역함으로써 금강정경계의 경전을 가장 먼저 번역했다. 또한 금강지 삼장은 만다라의 관정도량을 건립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관정을 베풀어 중국민중들이 밀교와 친숙해지도록 했다. 그가 머물던 광복사 에 건립한 비로 자나탑원은 자신이 모두 설계를 하였는데 당시 사 람들이 그 형태와 장엄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 한다. 금강지 삼장은 20여년 동안 중국에 머물 면서 금강정경계통의 밀법을 중심으로 중국에 정 통밀교를 전하기 위해 힘쓰다가 서기 741년 기세 를 일기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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