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전래와 밀교의 역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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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00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08-03-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100호 기념 특집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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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19 06:15 조회 1,891회본문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전경. 서기 384년(백제 침류왕 1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불경 등을 가 지고 중국 동진에서 건너와 백제 땅에 첫발을 내 디딘 곳이다. 지금의 전남 영광 법성포가 그곳이 다.〈자료출처 : 전남 영광군 자료사진〉
1. 불교의 전래와 밀교의 역사
불교가 우리 나라에 제일 처음 전 래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고구려 소 수림왕 2년(기원후372년)으로 중국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와 함께 불상과 경전들을 고구려에 보내 면서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로 전래 되었다.
백제는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침류왕 1년(384년)에 중국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서 불교 가 전래되었다. 마라난타는 인도 간 다라 출신으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 동진을 거쳐서 백제로 건너와서 불교 를 전파하였다. 굴비로 유명한 전남 영광의 법성포가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로알려져 있다.
백제불교의 전래에 대해서『삼국사 기』『삼국유사』『해동고승전』등에 기 록되어 있다.『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석 마라난타는 인도 줄신의 승려이 다. 그는 신통한 힘을 지녀 온갖 일
을 해내는데, 그 능력을 헤아릴 수 없었다. 스님은 불교를 전파하는 데 뜻을 두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 서 교화하였다.’ 고 하였다. 인도승 마 라난타의 불교전래로 인하여 고유한 백제불교문화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 다. 신라 불교의 전래에 대해서는 여 러가지 설이 있지만『삼국사기』에 근 거한 내용이 가장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법흥왕 15년(528년)조에&)의 내용이다. 여기에는 신라에 처음 불 교가 전해진 것에서부터 공인되기 까 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포")가 고구려에 서 신라의 일선군으로 오면 서부터라고 한다. 일선군은 현재의 경북 선산군이다. 묵호자 가 신라 일선군에 왔을 때, ‘모례’ 라고 하는 사람 이 집안에 굴실을 만들어 그를 살게 했다.
백제불교 전래의 재현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06년 5월 13일 재 현된 행사 사진이다.〈자료출처 : 전남 영광군 자료사진〉
그때 중국 양나라 왕이 사신을 통해 신라왕에게 옷과 물건. 향을 보냈다. 그 이름과 사용법에 대해 몰라 묻고 다니던 중에 묵 호자가 그 이름을 가르쳐 주면서 “이것을 태우면 꽃 다운 향기가 높이 휘날리 며 정성으로 신성에 게 통할 수가 있다.…중 략...만약 향을 태워 발원 한다면 반드시 영험이 있 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때 왕녀가 병이 들어 위급한 상태이므로 그는 향을 태워 서원케 하였더 니 쾌유되었다. 왕은 대단 히 기뻐서 예물을 하사하 였다. 묵호자는 받은 물건들을 모례 에게 주고 떠났는데 그 이후로 행방 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불교가 신라에서 정식으로 공인된 것은 법흥왕 때에 이르러서이다. 이차돈의 순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이 불교를 받아들이고자 하였으 나 군신들은 불교를 반대하였다. 이 에 불교의 선교(터커)를 위해 이차돈 은 자신의 목이 베이는 형벌을 기꺼 이 받아들였다. 이차돈은 "불법이 일 어난다면 신은 죽어도 애석함이 없습
니다.”하며 순교를 자처했다.
군신들은 “오늘날 승려들은 머리를 깎고 이상한 모습의 의복을 입고 있 으며 그들의 말은 괴상하여 보통의 도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그냥 방치 해두면 아마도 후회가 따를 것입니 다. 신들은 어떤 중벌을 받는다 해도 왕의 어명에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이차돈은 “나는 불법을 위하 여 형을 달게 받겠습니다. 부처님께 서 영험이 있다면 내각 죽은 뒤에 반 드시 이변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 했다. 이차돈의 목을 치자 흘러내린 피는 흰색 젖과 같이 희고, 목은. 날 아가 금강산정에 떨어지고 하늘은 빛 을 잃고 땅은 진동하였다.
대중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두 번 다시 불교를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반월성에서 날아간 이 차돈의 목은 멀리 금강산정에 떨어졌 는데 그곳에 절을 .지어 ‘백율사’라 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라불교는 국가적인 승인하에 신봉되었다.
삼국시대에 처음 전래되었던 불교 의 가장 큰 특징은 밀교에 가깝다는 점이다. 처음 불교가 전해진 내용들이 모두 신이와 기복이란 점 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분히 밀교형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불교가 모두 밀교였다는 것은 아니 다. 밀교 뿐만 아니라 대 우 소승의 불 교가 공존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화엄, 유식 뿐만 아니라, 정토, 미륵신앙, 밀교 등이 유행하였다.
그 당시 밀교의 형태는『삼국유사』 의 기록에서 단편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당시의 밀교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으 나 복잡한 교리를 기반으로‘ 하는 교 학적인 이론의 불교라기 보다 현세이 익과 양재초복적인 형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삼밀수행이 체계화되거나 성불을 목적으로 하는 순밀의 형태라기 보다 재난을 소멸하고 복을 기원 하는 잡밀적 요소가 농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신이 신통의 내용은 여러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해 동고승전』에 기록된 백제불교 전래에 있어서 ‘석 마라난타가 신통한 힘을 지녀 온갖 일을 해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신통한 힘을 지녔다는 내용에서 밀교의 각종 비법을 짐작케 한다.
또한 신라불교의 전래자인 묵호 자가 신라 일선군에 왔을 때, ‘모례’ 라고 하는 사람이 집안에 굴실을 만들어 그를 살게 했다는 점에서
밀교 수행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굴실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굴실은 ‘신라인과는 전혀 다른 이국의 사람을 숨겨주기 위한 것’이기 도 하지만 무엇보다 ‘비밀의궤, 비전으로 상징되는 밀교의 수행’에 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수행하는 것은 아무도 보아서 는 안되는 비밀불교의 수행이었을 가 능성이 높다. 신이의 내용은 『삼국유사』에도 무수히 나온다. 뒤에 살펴볼 신라 밀교승의 행적에서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신이뿐만 아니라 초전의 불 교에 나타난 특징이 복을 구하고 재 난을 없애는 기복신앙의 형태다.『해 동고승전』의 순도전)에 보 면, 인과에 대한 대목이 나온 다. 인과를 설한 배경은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설 하므로써, 현세에서 복을 누리려면 좋은 인을 지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있다. 인과설이 현세적인 복락을 구 하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그 바탕은 현세이익의 공덕과 양재초복 를 기원하 는 밀교적 성격을 지닌 불교였던 것이다.
백제의 불교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초복적인 신앙형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백제 17대 아신왕은 원년에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는 교시가 있었던 바, 불교는 그야말로 복을 구하는 신앙이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불교가 백제에 전래될 당시 초복적인 불교로서 다분 히 밀교의 형태였음을 보여 준다. ‘불법의 숭신’이 불교 본래의 신앙적 형태라고 한다면, ‘복을 구하라’는
대목은 기복신앙으로서 현세이익과 초복의 밀교 신앙형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라난타의 전기에서 도 백제불교의 밀교적 요소들을 엿볼 수 있는데,『해동고승전』에 “그는 도승으로서 신통이변의 기행으로 무언무설의 교화를 하였다”는 기록에서 그 의 교화가 말로 설하기 보다는 행동 으로 보여 주는 교화방편이었음을 보 여준다.
말로써 설한다는 것은 이론적인 교 설을 의미하지만, 무언무설의 신통이변은 밀교만이 가지는 심비성과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신통이변을 보였다는 것은 밀교의 주술적인 의궤를 담당하는 궤범사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밀교에서 얻은 그의 법력을 말하는 것이 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당시 동진(317〜420)시대에는 이미 대승경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밀교경전들이 번역 유포되었기 때문에, 마라난타가 전해준 불교는 백제사람들의 고유문 화와 조화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신이의 법력을 구사하여 제재초 복을 비는 초기밀교 신앙이었다고 말할 수있다.
위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내용들이 정통적인 밀교 전래의 역사라고 단언 할 수는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 어보아 그 당시의 불교가 밀교적인 색채를 띄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바이다.
다시말해서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에 이미 밀교적 요소와 신앙이 폭넓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밀교의 역사는 바로 삼국시대의 불교 초전과 궤를 같이 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법경 정사/ 밀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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