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수행하기 공주(共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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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00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6-07-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불교의 선정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정사 필자정보 화령 정사 / 철학박사 중앙교육원장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13 13:40 조회 2,302회본문
함께 수행하기 공주(共住)
생활 중의 정념 7
정념 수행의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은 수행자들 끼리 함께 기거하면서 정념을 닦는 것이다. 혼자 서는 자칫 게을러질 수 있는 수행이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 서로가 의지도 되고 서로의 모습을 바 라보며 더욱 분발하면서 수행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적절 한 도반을 선택하는 것이 우선이다. 좋은 도반의 조건으로서는 계를 지키지 않거 나 말을 함부로 하여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이나 산만하고 무례하여 다른 사람의 정서를 무시하는 사람은 안 된다.
논 쟁을 좋아하거나 하찮은 일에 너무 관심이 있는 사람도 곤란하다. 술, 담배에 탐 착하거나 이성에 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경우 등 세속의 쾌락에 너무 기울어져 있는 사람도 안 된다. 같이 수행을 하려면 우선 구도의 정신이 열렬 하여야 하며 계를 잘 지키고 겸손하고 남을 배려 할 줄 알며 말을 적절하고 온건하게 하며 청결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함께 수행하는 데에는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언젠가 아난다가 이런 종류 의 좋은 도반을 가지는 것은 도를 절반이나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니냐고 부처님께 여쭙자 부처님께서는 아난의 말이 맞지 않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좋은 도반을 가지는 것은 도를 절반 이루는 정도가 아니라 도를 다 이룬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시는 장면이 《아함경》에 나 온다.
그만큼 좋은 품성과 자질을 지닌 도반과 함께 수행하는 효과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 씀이다. 도반의 격려와 도반의 훌륭한 구도의 모습을 보면서 자극을 받고 따라 한다면 혼자서 수행을 하면서 해이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의지가 꺾이 게 되는 경우를 면할 수 있게 된다. 청소년들이 좋은 환경의 집을 놔두고 굳이 도 서관이나 독서실에서 공부하겠다고 고집 세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학생들이 혼자 서 공부하면 나태해지기가 쉬우므로 여럿이서 공부하는 데에 가면 다른 사람의 눈도 의식되고 경쟁력도 불타서 자신을 더욱 채찍질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수행에 있어서도 좋은 도반 과 함께 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전문으로 수행하는 출가자들도 그렇지만 일상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재가자들도 뜻이 맞는 사 람들끼리 일정 기간 함께 수행을 하고 나면 정진 력이 몰라보게 향상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함 께 수행을 해야 할 때는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우선 서로에게 친절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정 서를 해치지 않도록 매사에 배려하는 마음이 중 요하다. 같이 생활하는 경우에는 청결과 정돈도 필수적이다. 주위 물건을 어지럽혀 놓거나 잘 씻 지 않아 몸에서 냄새가 나면 곤란하다. 수다스럽 지 않고 말도 공손하고 기분 상하지 않게 하여야 하며 공공 기물을 아껴 쓰고 다른 사람의 일에 간 섭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리고 특정인에게 너무 지나친 관심을 보이 거나 차별하는 태도도 좋지 못하다. 함께 수행하 는 기간은 한 번에 6개월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
너무 길게 되면 장소나 특정인에 대한 분별심이 나 집착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함께 수행을 하면 경험자로부터 적절한 지도 도 받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잘 이끌어 줄 수 도 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적을 받으면 감사 한 마음으로 합장을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 로 삼아야지 화를 내거나 변명을 하는 것은 좋 지 않다. 여러 사람과 함께 수행할 때는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항상 자비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잘 참으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 를 지녀야 한다. 그렇게 하는 자체가 큰 수행이 되기 때문이다.
화가 나는 경우가 있어도 정념을 지니고 화가 일어나는 모양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면 화가 사 라지게 된다. 그리고 서로가 함께 있게 된 인연 에 감사하며 항상 자비심을 바탕에 두고 생활한 다면 공주(共住)의 수행은 더욱 효과를 얻게 될 것이다.
정념으로 반야지혜를 획득
실상의 관조로 개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야 우리가 정념을 통하여 얻으려는 것은 반야지 혜이며 궁극적으로는 반야지혜를 통하여 괴로움 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개념에 속박된다. 기존 세대가 형성해 놓은 개념 에 따라 자기의 인식구조도 그렇게 닮아가며 살 아가는 동안에 우리 스스로도 수많은 개념을 만 들어가며 거기에 속박된다. 좋다 나쁘다, 아름답 다 추하다, 크다 작다 등등 우리는 우리가 형성 해 놓은 개념에 따라 거기에 부합하면 좋은 것 으로 보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나쁜 것으로 본 다.
사물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만든 개 념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한다. 말하자면 자기의 입장에 따라 모든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예 를 들면, 동성애가 좋은가 나쁜가를 가지고 싸운 다든지 백인은 어쩐지 좀 있어 보이고 흑인은 괜 스레 차별한다든지 하는 것도 자기가 만든 개념, 즉, 선입견에 의하여 그렇게 그릇된 판단을 하면 서 갈등을 불러오고 스스로도 그런 개념 작용 때 문에 사고가 한정되어 괴로움의 길을 걷게 된다. 선입견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는지를 쉬운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자.
요강을 깨끗이 씻고 삶 아서 소독한 다음 거기에 밥을 담아주면 어떤 생 각을 하게 될까? 요강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아무 래도 찜찜하여 밥 먹기가 거북할 것이다. 똥이 방 에 있으니 더럽다고 하지만 농사짓는 농부는 밭 에 있는 똥을 보고 좋은 거름이라고 생각한다. 가 을에 길가에 나뒹구는 노란 은행잎이 감수성 예 민한 시인에게는 더없이 정겹게 다가올지도 모 르지만 청소부에게는 마냥 짜증 나는 일이 된다. 서로 사랑한다고 하여 결혼하지만 살다 보면 사 랑의 개념이 서로 달라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 도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랍권 사람들이 생긴 것도 다 비슷하고 종교도 같은 것을 믿는 것으로 보지만 그건 우리 생각이고 자기들끼리는 이념 이 달라 처절하게 싸운다. 이처럼 모든 사물과 현상은 실체가 공한 것으 로서 우리가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가 진 개념을 실체시하여 거기에 주관적인 가치 판 단을 내리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고 대응한다. 지 금 온 세계가 테러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데 그 러한 것도 다 사물과 현상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에게 형성된 개념에 속박되어 자초하는 괴 로움이다.
정념을 통하여 반야지혜가 생겨 사물 의 공성과 연기성을 제대로 꿰뚫고 있으면 그런 어리석음을 범할 수가 없다. 반야지혜는 흔히 말하는 지식과도 다르며 지 식의 축적이 바로 지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매일 독경을 하고 불교 지식이 많다고 해서 반야가 획 득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을 바탕으로 정념 수행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사물과 현상을 통찰 하는 반야지혜가 생긴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 이 반야지혜를 갖추고 있지만 누구나가 다 반야 지혜를 발현하는 것은 아니다. 탐진치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나지 못할 뿐이다.
밝은 마음으로 견성을 하고 청정한 본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에게 내재한 반야지혜 가 드러난다. 마치 흙탕물이 가라앉고 맑아지면 물밑이 환히 보이는 것처럼 정념 수행을 통하여 우리의 청정 본성이 제 자리를 찾게 되면 사물을 통찰하는 반야지혜가 드러나게 된다.
열린 마음과 관용으로 집착을 벗어야 사무량심으로 지금 이 순간의 평정을 누려야
사물과 현상을 바로보기 위해서는 반야지혜가 있어야 한다. 반야지혜는 정념을 통하여 얻어지 지만 정념에 쉽게 들기 위해서는 평소의 생활 태 도가 토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생활 중에 서 계행을 잘 지키고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여기에 더하여 열린 마음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생활태도를 지녀야 한다. 수 행을 하다 보면 어떤 견해에 집착하여 그것이 도 리어 깨달음의 장애가 되는 경우도 있다. 자기는 계행을 지킨다고 하는데 그것이 도리어 주위 사 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자기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진심을 내는 경우도 많다. 자기는 정법을 수호한답시고 하는 것이지만 옆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그것이 또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줄을 모른다. 흔히들 하는 말로 “벼룩 서 말은 몰 고 가지만 중 셋은 데리고 가기 어렵다.”고 조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수행을 전문적 으로 한다는 사람들의 맹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정법도 버려야 하거 늘 정법이 아닌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느냐” 고 하시면서 뗏목의 비유를 드셨다. 우리가 열반 의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불법이 라는 뗏목을 의지해 건너가지만 다다른 뒤에도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라고 하셨다. 아무리 진리라도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또 다른 괴로움을 낳게 되는 원인이 되기 때 문에 수행자는 늘 열린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 들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자(慈)·비(悲)·희(喜)·사(捨)의 사무량심( 四無量心)으로 지금 이 순간의 평정을 누리도록 해야 한다. 즉,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자 애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대하며[慈], 불쌍한 중 생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음[悲]과 함께 중 생들이 고통을 벗어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함 께 기뻐하며[喜], 망견과 편견을 내려놓고 관용 으로 충만하여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하며 집착 하지 않는[捨]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의 고요함 을 누릴 때에 진정한 정념이 이루어진다. 항상 깨 어 있는 마음으로 사무량심을 넓혀 갈 때에 마음 의 평화가 깃들고 매 순간 법열을 맛볼 수 있다. 호흡의 관찰과 편안한 마음, 사무량심에 의한 중 생에의 무한한 사랑이 충만할 때에 이 세계와 우 주는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며 극락 정토가 바로 여기에서 실현된다. 즉신성불(卽身 成佛)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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