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소식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금강정경> 출현 이후 인도불교의 변화

페이지 정보

호수 211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7-06-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

페이지 정보

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정성준 교수 동국대 티벳대장경 역경원 전임연구원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15 01:39 조회 2,667회

본문

<금강정경> 출현 이후 인도불교의 변화
정성준 교수의 후기밀교

02772180a6d25ec8d69d29e244790bc4_1528994374_4232.jpg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누구나 나란다사의 유적을 반드시 방문하게 된다. 나란다사의 승원대학은 방대 한 도시를 상상할 정도로 규모가 큰 불교대학이었 다. 나란다대학에 남겨진 유적과 유물 가운데는 밀 교와 관련된 흔적들을 수없이 볼 수 있다. 나란다대 학의 영광을 회상하면 누구나 인도에서 불교가 사 라진 원인에 대해서도 생각하기 마련이다. 불교사를 공부하다보면 인도불교의 멸망 이유로 이슬람의 침 공을 든다. 이외 다른 원인으로는 불교의 밀교화에 의한 힌두교화에 그 원인을 찾는다. 십여 년전 필자가 나란다사를 방문했을 때 벽돌로 된 담벽 깊은 곳에 손을 넣어 경전의 단편이라도 잡 으려 기대한 적이 있었다. 손에 집힌 것은 탄화된 벽 돌 부스러기였다. 

불교승원에 대해 파괴와 승려에 대한 살육이 자행된 것은 이슬람에 의해 이루어졌으 며 나란다대학의 경우 방화에 의한 화재가 수개월 이상 그치지 않았으며, 승려로서 단 한사람도 살아 나가지 못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나란다대학뿐만 아 니라 위끄라마실라사와 오단따뿌리사의 승원대학 을 비롯해 인도 전역의 승원이 피해를 입었으며 이 러한 폭력이 백여 년 이상 지속된 끝에 불교는 석존 의 고향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필자가 손에 쥔 탄화된 검은 벽돌은 당시의 방화에 대한 역 사적 흔적이었을 것이다. 

나란다사가 파괴된 이후 불교가 자취를 감춘 10-11세기 전후 인도는 많은 힌두교 사원이 불교와 마찬가지로 존재했었다. 그런데 유독 불교사원과 승 원대학만이 큰 피해를 입고 인도에서 자취를 감춘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인도불교 멸망 마지막 순 간 까지도 불교교단이 힌두교와 차별된 독자적 승원 전통과 조직, 문헌, 사자상승의 법통을 지키고 있었 다는 반증이다. 불교가 힌두교처럼 타락해서 뒤섞여 있었다면 불교승원만 조직적 피해를 입는 것은 불가 능해진다. 이슬람의 세력 확장 당시 이슬람 군주는 이슬람의 수피를 초청해 불교교단에 대해 이슬람의 우월성을 강변하였다. 불교교단은 석가모니붓다 당시부터 불 교논리학의 기초가 마련되어 5, 6세기 달마끼르디와 디그나가와 같은 인명가에 의해 불교논리학의 독자 적인 영역이 마련되었다. 

불교논리학은 석가모니붓 다의 연기법과 무아설을 비롯해 대승불교시대의 중 관, 유식 등의 세련된 논리방식을 수백 년 동안 발전 시켜왔기 때문에 유신론에 입각한 수피즘의 사변으 로 불교를 당해낼 수 없었다. 나란다사에 남겨진 유 적 가운데 밀교의 도상이나 유물은 확실히 힌두교의 그것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힌두교와의 외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두 려워하고 경외시한 이유는 유사성 내면에 담긴 불교 고유의 사상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붓다 이후 붓다의 가르침을 전했던 인도 불교교단과 대중들은 붓다의 근본가르침을 왜곡하 거나, 힌두교화 되지 않았고, 이슬람의 무력시위와 위협에 대해 목숨을 포기하면서 교단과 승원의 전통 을 한사코 지키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인식 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딴뜨라라는 성전의 전통에 입각한 인도후기밀교에 대한 이해이다. 인도 후기밀 교는 『대일경』과 『금강정경』과 다른 새로운 밀 교의 전통을 보여준다. 그 외형은 생소하며 도상의 이해 역시 난해하지만, 석가모니붓다의 승원전통에 대해 ‘딴뜨라’라고 부르는 새로운 성전의 전통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금강정경』에서부터 비롯 되었다. 금강계만다라 가운데 미세회와 이취회는 인도 후 기밀교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부파불교에 성립된 37조도품과 아비달마의 교학과 수행체계, 대 승불교의 보살도와 유가행은 인도 후기밀교의 교리 와 생기차제와 구경차제로 대변되는 수행전통의 기 반이 된다. 딴뜨라시대의 수행유파들은 바라밀문으 로 알려진 현교의 수행전통을 관념적 이해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인 수행전통의 체계로 완성하였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붓다 정각의 직접적 계기가 된 12지연 기법의 순관, 역관을 생기차제와 구경차제의 수행체 계로 완성하였고, 생명탄생과 우주의 성립, 정신으 로부터 육체적 존재의 실현과정은 챠끄라상와라딴 뜨라, 깔랴챠끄라딴뜨라와 같은 딴뜨라의 성취법과 사자의 서와 같은 비밀한 문헌에 수록되어 있다. 인도 후기밀교시대는 불교논리학의 전성기에 해 당한다. 깔랴챠끄라딴뜨라와 같은 불교교단 최후의 성전은 찌루와 같은 학장에 의해 500여 승려와의 논 쟁 끝에 불교수행으로 인정되었다. 

불교딴뜨라가 그 교학이나 수행체계가불교교리와 수행으로서 인정 되기 위해 석가모니붓다의 근본가르침에 위배되는 지 여부를 치밀한 논리적 검토에 의해 결정하였기 때문에 훗날 수많은 후기중관파의 논사들과 나란다 대학의 학장들이 이론적으로 인명을 공부하고, 수 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밀교를 수행한 사실이 역사적 검토와 문헌적 예증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