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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의 나라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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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21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09-12-20 신문면수 11면 카테고리 해외불교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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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2 07:42 조회 3,00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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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의 나라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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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신전, 딱프롬사원 입상 관음상이라고도 한다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의 남서부에 있는 나라로, 1863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이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1940년 일본에 점령되었고 일본 패전 후 1947년 5월 프랑스연합 내의 한 왕국으로 독립했으며, 1953년 완전한 독 립을 했다,정식명칭은 캄보디아왕국  으로 1993년 입헌군주 제로 복귀했다. 인도차이나 반도 남동부 캄 보디아 평원을 차지하는 평원국가로, 북동쪽 으로 라오스, 동쪽과 남동쪽으로 베트남, 북 쪽과 서쪽으로 타이에 접하며, 님서쪽으로 시암만 에 면한다. 국명은 프랑스 어 인 를영어로음역 한 것으로, 고대의 깜부자  왕 국에서 유래했다. 인구의 약 75%가 크메르 족의 후예이다. 크메르족은 캄보디 아에 약 500만, 베트남 50만, 타이 30만, 라 오스에 5천여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한글과 비견되는 매우 독창적 언어인 크메르 어를 사용했다. 캄보 디아 공용어인 크메르어는 남인도계 표음문 자로 33개 자음문자 의 좌우 상하 에 모음기호  20개를 붙이며 모음 과 2중 자음이 많다.

1975년에 폴포트 가 이끈 크메르루 즈 정권때 잔인하고 무자비한 반대파 학살로 150여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캄보디아 불교

,캄보디아는 한때 ‘크메르’라고도 불렸다. 전설에 의하면 고대,.캄보디아는 인도에서 건너온 왕이 이 나리의 여왕과 결혼하여 개 국했다고 한다. 이는 캄보디아의 종교와 문 화가 인도로부터 전래되었다는 것을 방증한 다. 캄보디아 불교는 힌두교와 혼재되어 있 어 미신적, 토속적 요소가 많다. 앙코르와트 유적은 불교와 힌두교의 혼융된 모습을 잘보여준다. 11세기 이후 확립된 소승 상좌부 불교의 전 통은 캄보디아를 인도차이나지역 주요 불교국으로 발전시켰다. 캄보 디아의 젊은이들 은 누구나 한번쯤 출가생활을 하는 것이. 전통으로'되 어 있으며, 사원에 서의 불교교육은 그들의 가치관 형 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승단의 조직은 태국과 마찬가지로 마하 니카야와 담마유타 니카야 양파로 나누어져 있다. 승려의 수는 1970년 통계에 따르면 마' 하 니카야가 53,200명, 담마유타 니카야가 1,300명 등 54,500명이었다. 사찰 수는 총 3,090개로 마하 니카야가 2,980개, 담마유타 니카야가 110개다. 1946년에는 2,696개의 사 원에 65,048명의 승려가 있었다. 승려의 수 는 약간 줄어들고 사찰은 '계속 늘어난 셈이 다.

승단은 상가나요크라 불리는 수장  에 의해 통솔되는데, 서로 독립되어 각자의 교단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캄보디아 불교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사회 교육적 기능이다. 대개의 교육기관은 사찰에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 전체 를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종교 교육을 할 수 있다. 1970년 통계에 따르면 캄보디아 불교- 사원에서 운영하는 초등팔리어 학교가 529 개, 학생 수는 10,983명이었고, 불교 고등학 교는 2개에 학생 수 500명, 불교대학은 1개, 학생 수 112명이었다. 1975년 인도차이나반

도가 공산화 되고, 폴포트 정권은 대학살을 자행하고 종교도 완전히 없애버렸다. 헴 삼 린 정권이 들어서면서 몇 군데의 사원이 복 구되기는 했지만, 승려가 되는 것은 제한했 다. 공산주의자들은 ‘과학적 유물론은 미신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며 학살 만행을 피해 살아남은 스님들이 불교 교리를 전파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불교가 수천 년에 걸쳐 민중들의 생활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민간 에서는 여전히 불교적 요소가 많다.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때 불교 전래

캄보디아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기 원전 3세기경에 아쇼카왕이 파견한 전도승 - 에 의해서라고 전해진다. 이는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파된 것과 때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역사가 1세기말 메콩 강 하류에서 부남 이란 나라가 세워진 것 에서부터 시작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캄보 디아불교사의 단초로는 볼 수 없다. 캄보디 아불교사의 첫 장 은 3세기 초 열렬한 불 교신도였던 범만왕  시대 때부터 비 롯된다. 그는 사원을 짓고 승려를 존중했으 며, 불교를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이어 5세기 초, 카운디야 왕조가 들어서면 서 캄보디아의 불교는 크게 융성하여 승가 바라010쮸: 460〜524)와 같은 유명한 고 승을 배출했다. 그는 512년 아육왕경  등 많은 불전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가 양무제 의 명을 받아 역경에 종사했 다. 이에 앞서 사야발마왕 때에는 나가세나   비구가 제남 의 무제에게 파 견돼 불상을 헌납하고  돌아오기도 했 다. 이렇게 부남시대 의 흥성했던 불교는 중국의 구법고승 의정삼장

635〜713)이 쓴 동남아여행기《남해기귀 내법전 )에도 소상한 기록 이 나온다. 권 1에는 "옛날에 부남국 이라고 불렀던 나라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천신을 모셨으며 뒤에 불교 가 왕성해졌다. 현재는 나쁜 왕이 불 교를 멸망시키고 승려도 없다. 지금 은 불교 이외의 여러가지, 종교가 성 행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부남시대의 캄보디아 에는 정량부 와 유부 의 불교가 유행했었다고 한다. 동남아의 중심 국가로 6세기까지 흥성했던 부 남은 속국이었던 진랍 의 샤나 바르만왕에 의해 멸망했다. 샤나바르 만시대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대승불 교가 이입 됐다는 사실이다. 최 근 발견된 자료는 이 시대에 관세음보살상 건립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진 : 랍은 한때 융성했으나, 왕위계승 문제가 원 : 인이 되어 남북으로 분열됐다. 이를 수진랍육진래쌔이라 하는데, 9세기 초 자야바 르만 2세가 재통일을 하고 앙코르왕조를 열었다.

앙코르왕조의 3대왕인 야쇼 바루만 1세는 수도를 앙코르 톰으로 옮기고 대승불교를공식으로 승인했다. 그는 특히 세계적 걸작품으로 알려진 앙코르와트 를 조영한 .왕으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캄보디 I 아 특유의 힌두교와 불교가 혼재하고 있다. 이어 1002년에 즉위한 스리아바루만 1세는스스로 불교도임을 선언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하지만 앙코르욍조는 힌두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를 탄압하지 않았으며 소승과 대승도 엄밀하게 따지지 않았다. 1181년에는 캄보디아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자야바루만 7세가 즉위하여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다. 그 는 열렬한 불교신도로서 특히 관음신앙이

대단히 깊어 여러 곳의 거대한 암석에 관세 음보살상을 조각했다. ‘앙코르의 미소’ 또는 ‘크메르의 미소’로 불리는 이 조각은 눈을 | 반쯤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논 신비한 미소 ; 를 띠고 있어서, 크메르불교미술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앙코르 왕조는 자야바루 |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양^은 인도의 만 7세 시대를 절정으로 점차 쇠퇴하여,영향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 13〜15세기에는 태국의 침공을 받아 앙코르 : 조장식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톰을 포기하고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겼으나 : 독자적인 양을 지니고 있다.

결국 1593년 완전히 멸망했다. 타이족의 영향은 결국 상좌부불교를 제외한 대승불교와 바라문의 쇠퇴를 가져왔다.


캄보디아의 근대사는 19세기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로 시작된다. 프랑스는 불교 전교를 억압했으나, 앙코르의 유적군 은 그들에 의해 발굴되고 보호됐다. 오늘날 세계에 자랑하는 앙코르의 유적은 1898년 월남의 하노이에 세워졌던 ‘프랑스 극동학원’의 연구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외국의 : 지배 아래 있으면서도 캄보디아 국민의 불교에 대한 신앙은 열렬했다. 황의를 입은 승려들은 승복을 입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경을 받았으며, 외국인들은 캄보디아를 ‘승려의 나라’ 라고 부를 정도였다. 불기 2494년(1950)에는 인도에서 사리불과목건련(6%) 유골을 봉안해 서 와서 대대적인 법회를 가졌으며, 불멸 2500 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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