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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신앙의 발원지 밀교도량 사천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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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24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10-03-25 신문면수 12면 카테고리 탐방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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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2 11:01 조회 1,6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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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신앙의 발원지 밀교도량 사천왕사
-명랑 법사, 신인비법으로 당군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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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배반동 사천왕사지 뒤신이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신라의 승려 명랑 은 어머니 가 자장율사의 누이동생이었다. 632 년 (선덕여왕1) 구법차 당나라에 갔 다가 밀법을 배워서 4년 후에 귀국했 다. 명랑이 당에 갔을 때는 밀교가 널리 퍼져서 후한 과 진 을 거쳐 북위서와 양 대를 지나 면서 많은 밀교 경전이 역출되어 당후) 시대에는 청우법 등 여 러 밀주법 이 유포되어 있었 다. 특히 지통 이 천안천비관세 음보살다라니경"뛔!%% 쪠%)을 번역하여 천수관음법이 알려진 시대였다.

명랑은 신라로 귀국하는 길에 용왕 의 요청으로 용궁에 들어가 밀교비법 을 전하고 용왕으로부터 황금 천 냥 을 시주받았는데 땅 밑을 통해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절로 만들어 용 왕에게서 받은 황금으로 불상과 법당에 도색을 하였으므로 절 이름을 금광사 라 하고 밀교 포교에 힘 썼다고 한다. 밀교의 문두루비법으로 도량을 열어 국난을 물리쳤기에 후에 신인종 의 조사로 불리게 된 다.

신라의 신인비법 과 고려 의 신인종 의 “신인 ”이 란 뜻은 범어 ‘무드라’를 음역해서 문두루 라고 썼던 데서 유래 했다고 한다. 밀교의 결인 을 가리키는 것으로 문두루를 신 인 이라 한다. 유상유가  입장에서는 신 . 구 . 의 삼밀 중 에 신밀 에 해당된다. 밀교의 관정경 에 의거한 밀교의 호 국의궤로써 신인비법을 처 음 설행한 사람이 명랑법사였다.

당나라는 평%을 함락시켜 고구 려를 멸망시켰으나, 본국으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백제에 머물러 기회를 틈타 신라를 침략하려 하였다.

당시 당나라에 유학하고 화엄을 전 수해 와 해동화엄초조 라 불리는 의상 이 670년 당 고종의 신라 침공 계획을 문무왕에게 알리기 위해 귀국한다. 정보를 접한 문무왕이 명랑을 불러 자문을 구하였 더니, 명랑은 경주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문두 루비밀법의 도량을 개설할 것을 주청 했다. 이미 설방 이 이끄는 당 나라 군사 50만이 국경에 집결하였다 는 급보가 들어왔다.

명랑은 급히 낭산  남쪽 신유림자〜)에 채백 오 로 임시 사찰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  을 만들어 동.서.남부중 앙에 안치하고, 밀교에 밝은 유가종  의 명승 대덕 12명을 뽑 아 신인비법을 행했다. 당의 군대는 신라와 교전도 있기 전에 바람과 파 도가 일어나서 군선 ’이 모두 침몰하였 다고 한다.

이듬해에 당나 라 장수 조헌 이.5만의 군사 로 침략했을 때도 명랑은 신인비법으 로 당군08토)을 물리 쳤다고 한다. 문무왕 19 년(679년) 명랑은 밀교의 신인비법으로 당나라 군사를 물리 쳤던 경주 신유림에 절을 신 축하여 사천왕사 라고 했 다. 후에 신라 조정에서는 사천왕사 성전 이란 관청을 두어 직급이 높은 신하들로 사천왕사를 관 리하게 하였다.

명랑에 의해 신라에 전파된 밀교의 문두루비법은 밀교 경전인 관정복마 봉인신주경 야!]1싸뿨호띠혀또쎄) 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 경에 설한대 로 불단(페혀: 만다라)을 설치하고 다라니를 독송하면 국난을 물리치고 나라를 수호할 수 있다고 한다. 명랑 이후에도 문두루도량은 계속되어 고 려 문종 28년(1074년)에도 경주 사천

왕사에서 27일동안 문두루도량을 베풀었다고 한다.

’ 명랑이 당나라 대군의 침략 소식을 듣고 사천왕사호)를 세운 것 은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진호국가 경전 으로 존숭되는(、 금광명경〉의 “사천왕품”에 의한 것이 다.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은 명랑의 후 예인 광학 과 대연 이라는 유가승의 작법으로 해적의 침입을 물 리치고 개성에 현성사 을 창 건하여 신인종 의 근본도량이되게 하였다. 고려 왕실은 호국을 염 원하는 밀교의례를 많이 개설하였는 데, 몽골의 침략이 있었던 고종 4년 (1217년) 4월에도 몽골군의 퇴치를 위해 현성사에서 문두루도량을 개설 하였다고 한다. 고려 조정에서 국가 적인 문두루도량을 개설하였던 사찰 은 특히 국경이 대륙과 접한 서경(평 양)에 많이 있었고 흥복사 . 영명사 . 금강사 . 장 경사  등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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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에서 드러난 금강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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