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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시대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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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20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8-02-28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정진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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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17 10:49 조회 2,40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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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한국불교이야기 (2회)

통일 신라 시대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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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 주교 지정 정사


이 당시의 불교를 이끈 거장으로 의상 (625-702)과 원효(617-686)를 들 수 있다. 의상은 한국 화엄종의 기초를 닦은 승 려이다. 그는 학문을 대성함과 동시에 제 자를 양성하고 대중 교화에 힘쓰며, 불교 의 사회적 실천에도 힘쓴 사람이었다. 그 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사물은 차별될 수 없다는 평등사상과, 상호 연관성을 중시 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후에 고려의 화엄 종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가지 주 목해야 할 것은 그의 신앙적 실천이 관음 신앙을 대중화 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 이다. 

이는 국토 및 동해 용왕 신앙과 결합 시킨 의상의 민족적 관음 신앙에 힘입었 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장의 문수 보살, 불국토 신앙이 사대주의적 요소로 인해 민중에게 외면 받은 것과 대조된다. 그는 권력을 멀리하고 완고한 골품제 사회에 서 신분의 평등을 주장하였고 왕에게 올 바른 정치를 직접 요구하는 등 지행일치 의 실천에 앞섰던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원효는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독창적 인 사상가이자 실천자였다. 특정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교학을 연구했다. 또 한 원효는 정토신앙을 대중화 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 고 그는 틀에 매이지 않는 생활로 대중 속 에 들어감으로써 역사와 민족의 기억 속 에 오래도록 살아남는 최대의 고승으로 자리 잡았다. 원효의 정토 구원관은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하고 귀족불교를 전면으로 부정 하였다. 그 당시 현실적으로 고통 받는 민 중에게는 엄격한 계율이나 어려운 이론 보다는 정토를 지향하는 염원을 가지고 삶을 이어나갈 의지가 더욱 절실하였다. 이러한 원효의 노력으로 신라의 불교는 점차로 귀족 불교에서 민중 불교로 넘어 오게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원효가 비록 지배 계급의 소유물이었던 귀족불교를 타파하고 민중불교로 이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시의 제도적 왕권불 교에 대응하고 정토실현을 위한 민중의 공동체적 노력을 수정할 수 있는 민중불 교 결사와 같은 조직화를 시도하지 않았 다. 특정한 스승이 없이 배웠다는 사실도 그의 통불교적 지향을 보여준다. 원효는 온갖 경론을 섭렵하고 주체적인 불교사 상을 확립한 신라 최대의 학자로서 수많 은 저술을 통해 중국, 일본 불교에까지 커 다란 영향을 끼쳤다.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파계한 원효는 스스로 세속인이 되어 민중 속으로 뛰어 든 것이다. 삼국유사는 원효가 이렇게 민 중 속으로 들어가 노래를 지어 부르며 사 람들을 가르침으로서 무지한 이들까지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고 ‘나무아미타불’ 을 외울 줄 알게 되었다고 전한다. 왕실과 귀족 및 소수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신라불교는 원효에 의해 비로소 민중 속 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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